사랑에 관한 단상
나는 소녀시절(중·고교시절)을 아마도 지적 허영심으로 보냈던 것 같다. 등록금을 늘 독촉 받던 누추하고 초라한 현실을 잊기엔 뜻도 모르면서 읽어대던 독서만한 것이 없었다. 다행히 지금의 학생들처럼 공부에 좇기거나 학원을 오가지 않아도 되었고 TV나 휴대폰도 없던 시절이라 시간의 풍요로움이 있었으며 학교 도서관은 늘 열려 있어서 비용 지출없이 풍성한 읽을거리가 기다리고 있었다.
읽고 싶던 책을 빌리던 날은 가슴이 콩닥거렸고 집으로 가는 발걸음이 바빠졌다. 빨리 읽고 친구와 서로 독후감을 나누는 시간이 기다려졌기 때문이다. 그 친구와 나는 서로 앞서거니 뒤서거니 같은 책을 빌려 읽으며 토론하기를 즐겨했다.
물론 지금 생각하면 그 토론은 유치했고 몇 걸음 나가지 못한채로 서로 말다툼을 하거나 그 책의 본질에 다가서지 못했다고 서로를 답답해 했다. 서로 더 어려운 책들을 소개하며 자존심 대결도 했다. 물론 그 책들은 너무 어려워 소화하지 못한 채로 소개 글이나 서문에 나온 작가의 변을 외워서 아는 체를 하기도 했다. 그래도 재미있었다.
그러나 얇은 지식으로 심도있는 토론을 하기엔 버거웠고 그래서 우리는 어느 날 토론 방법을 달리하기로 결정했다. 즉 한 가지 주제를 정해 그 주제에 맞는 책들을 읽고 토론을 하기로 했다. ‘정의’를 주제로 잡은 날이었다. 제목은 잊었지만 부잣집 개는 사람도 못 먹는 고기를 먹는다며 그 부자의 축재를 문제 삼고 마치 정의의 사도인양 흥분하며 우리는 사회적 부조리에도 눈 떠 갔다.
주제는 점점 어려워져 갔다. 인생(생로병사), 역사, 신앙, 성공, 진리 등…우리가 소화하기엔 너무 거창하고 어려웠다. 좀 쉬운 주제를 찾던 중 ‘사랑’이란 주제에 이르자 우리는 의기투합했다. 한참 민감한 시기의 두 소녀에게 사랑이라는 주제는 참으로 달콤하고 환상적일 수밖에 없었다. 우리는 둘 다 열심히 사랑이야기에 몰두해 갔다. 열심히 이것저것 읽고 어느 날 ‘완전한 사랑은 존재하는가?’를 주제로 토론해 나갔다.
모성애나 부성애에 이르면 숙연해지기는 해도 캐어보면 예외는 있어 완전하지 못하다고 결론 내렸고 우정이나 사제지간, 형제간의 사랑도 이해관계가 반드시 끼어 있어서 완전하지 못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렇다면 남녀 간의 사랑은 어떤가? 가장 아름답게 결론 내리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조건이 가장 많이 전제 되는 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었다. 있는 그대로(조재자체)를 사랑할 수 있을 때, 또 변하지 않을 때 완전하다 할 수 있을 텐데 남녀 간의 사랑은 외모, 성격, 집안, 학력, 능력 등이 조건이 되었으며 그 조건이 변하면 사랑도 변해 가는 경우가 많았다. 그 유명한 ‘로미오와 쥴리엣’의 사랑도 둘 다 죽음으로서 그 사랑이 완전하고 애절하게 느껴지기도 했으나 그들이 죽지 않고 결혼을 했으면 그 완전한 사랑을 했을까? 생각이 여기에 이르자 우리들은 ‘완전한 사랑’ 그건 거 세상에 존재할 수 없다고 결론 내렸다.
그러나 어느 날 만나게 된 성경에서 나는 비로소 완전한 사랑이 존재함을 알게 되었다. 가장 소중한 당신의 아들로 사랑의 징표주시고 더 없이 변심한 우리 영혼의 추함도 덮어주시며 아무런 조건 없이 은혜로 베푸시는 사랑, 큰 사랑 받기엔 너무도 작아 사랑인 줄도 모르는 어리석음을 끝까지 참아주는 사랑, 종일 울어도 모를 그 신실한 사랑. 슬라미나 고멜처럼 참으로 추하고 부끄러운 모습이나 아름답다 하시는 그 사랑을 어찌 완전한 사랑이라 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세상 어디에 이토록 아름다운 사랑이 존재하는가?
세상 언어로는 도저히 다 표현할 수없는 크고도 깊고, 넓으며 변하지 않는 사랑 있기에 나는 오늘도 세상을 당당하게 살아간다. 이금희/장안중앙교회 권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