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세월
세월 앞에 장사 없다 했던가? 며칠 전에 병원에 갔다.혈압이 급상승하면서, 위가 콕콕 쑤시는 것 같고, 머리가 깨질 듯 아팠다. 몇 번 겪은지라 크게 놀라지는 않았지만 항생제 과다복용에서 나타날 수 있다는 말에 새삼 몸이 버겁게 느껴졌다. 이제 내 나이도 꽤 두터워진 모양이다. 그러나 어쩌랴? 자고로 흐르는 세월을 피해간 사람이 없으니, 시간이 지나면 얼마나 하찮고 가소로운 엄살이었나 할 정도로 하나님께서 힘을 공급해 주겠지 하고, 링거 주사를 맞고 집으로 왔다. 어느 정도 자고 나니 꼼지락거릴 만했다.
새벽에 눈 뜨자마자 책상 앞에 앉았다. 아프다는 이유로 글 쓰는 것을 뒤로 미룰 수는 없었다. 하나님께서 하게 하심에 따라 감당하게도 하리라 생각하니 가볍게 글이 써지는 것 같다. 해야 할 일을 안 하면 스트레스다. 차라리 일하게 되면 마음이 편해지고 기운이 생긴다. 그렇다고 욕심대로 일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할 자신도 없을뿐더러 이제는 몸도 들어주지 않는다. 글을 안 쓴다고 따져 물을 사람도 없는데 글을 쓰게 되는 것이 진리를 알게 하신 하나님 은혜이고, 진리의 자유를 누리는 삶이 아니겠는가?
그렇지만 늘 덜 숙성된 맛이 아쉽고, 창문 너머 세상 속으로 떠나보내는 일이 여전히 떨리고 망설여진다. 그러다가도 그렁그렁 고여 있는 나의 옹색한 삶들이 여민 가슴 틈새로 툭 터져 나올 때면 말씀의 깊은 맛에 살짝 담갔다가 음미해 본다. 시고 떫은 과정 없이 어찌 단맛이 나올까? 성경을 공부해 가면서, 지금까지 살게 하신 하나님 사랑에 감동되어 살아온 지난 나의 삶을 돌이켜 생각해 보게 하는 그러면서 어찌어찌 쓰다 보면, 답답했던 마음에 숨통이 트인다. 비로소 고요한 침장과 성찰의 시간이 찾아든다. 성경을 읽거나 성경 강론을 듣고 나서 잠시 눈을 감고 음미하노라면 고개가 끄덕거려지고 미소가 번진다. 나에게 영원을 사모할 마음을 주지 않았다면 나약하기 그지없는 갈대요, 헛된 노동으로 세월을 낭비했을지도 모른다. 인생이 너무 허무해서 혼자 방구석에 앉아 흐느낄 것이다. 흐느껴 울어본 사람은 알겠지만 흐느껴 울다 보면 정말이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몸이 흔들리지 않던가? 그 흔들림 속에서 자신의 무능력을 짐작이나 하겠는가?
여류작가 박경리 씨와 박완서 씨의 노년관을 잠시 빌려본다. 박경리 씨는 운명하기 몇 달 전 이렇게 말했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렇게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그리고 노년의 박완서 씨가 쓴 글이다.
“ 나이가 드니 마음 놓고 고무줄 바지를 입을 수 있는 것처럼, 나 편한 대로 헐렁하게 살 수 있어 좋고, 하고 싶지 않은 것을 안 할 수 있어서 좋다. 다시 젊어지고 싶지 않다. 한 겹 두 겹 어떤 책임을 벗고 점점 가벼워지는 느낌을 음미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소설이 써지면 쓰겠지만 안 써져도 그만이다.”
모두 한국 문단을 대표하는 소설가이며, 조용한 시골집에서 행복하게 삶을 마감했던 분들이다. 천천히 걸어도 빨리 걸어도 더러는 조금 짧게 살다가, 더러는 조금 길게 살다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때에 이 땅을 떠나고야 만다. 하나님이 없다고 하는 인생들은 한평생 수고하며 살다가 죽음이 눈앞에 다가오고서야 허무함을 표현한다. 울며 태어나서 마음에 평안함을 누리지 못하고 근심하며 수고하다가 슬픔만 남기고 죽는다고 솔로몬이 일찍이 노래했다. 인생들이 애써서 고생한 것이 하나님께로 말미암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은 더할 수도 없고 덜할 수가 없다고 노래했다. 결국, 하나님을 경외케 하시려는데 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토지의 작가 박경리 씨, 그는 슬프고 괴로웠기 때문에 문학을 했으며 훌륭한 작가가 되느니 인간으로서 행복해지고 싶다고 털어 놓았다. 아버지와의 불화, 편모슬하에서의 불우한 성장기, 한국 전쟁 중 남편의 죽음, 어린 아들의 갑작스러운 죽음, 군사 독재시대의 폭력, 고독과 가난, 결코 지워지지 않는 피멍 같은 것들이 모두 누가 만들어 낸 인생 드라마인가!
인간은 진리에 의해서 인생의 참된 의미가 규정된다. 하나님의 살아계심이 인정되지 않고, 내 의지로 살아 보겠다고, 삶에 대한 의미 부여를 하지 못한 채, 자유를 갈망하며, 끝없는 허망한 세속적 가치에 붙들려 얼마나 고단한 인생이었는가를 엿보게 한다. 하나님의 속성이 드러나는 삶 속에서 영원을 사모하는 소망이 그에게 있었다면 삶의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확증되는 기쁨이 되지 않았을까, 진리를 아는 데 자유함이 있고, 행복이 무엇인지를 알게 된 사도 바울은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으로 인함이라” 했다. 사람 사는 집에는 어차피 큰일과 작은 일, 기쁜 일과 언짢은 일이 번갈아 주어지게 된다. 그 일들을 겪게 하신 분이 하나님이시다. 나에게도 죽을 것같이 힘들고 다시는 세상 안 볼 것처럼 방안에 틀어박혀 울며 지낼 때가 있었다. 우울증이었다. 때가 되어 나를 일으켜 세운 것은 하나님 말씀이었다. 버림받고 헐벗은 채, 친정으로 돌아온 딸처럼 마음 놓고 울게도 하고, 웃게도 하고, 그 투정 다 받아 주신 자비하신 하나님 은혜를 잊을 수 없다. 성도는 하나님 말씀, 성경권위를 벗어나서 결코 살 수 없음을 깨닫게 했다. 이 세상 무엇으로 나를 감동 시키겠는가?
아! 밤하늘을 지붕 삼아 목동으로 자란 다윗의 찬양이 들리는가? 실낱같은 한목숨, 나뭇잎처럼 힘없이 떨어지게 하는 날이 오면, 모든 것을 그대로 남겨두고 떠나지 않던가? 한 줌의 재가 되어 흙에 묻히고야 말텐데, 무슨 욕심으로, 무슨 욕망으로 그토록 발버둥 치는가?세상 부귀영화의 삶이란 바위에 낀 이끼와 같고, 아무리 화려하고 대단한 듯하여도 세상은 헛된 것이라 하지 않던가? 그러나 삶의 마지막까지 오랫동안 추억해도 좋을 하나님 사랑을 잊지 않고 기억하게 된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있겠는가?
흐르는 세월, 여호와를 경외하는 삶이 끊어지지 않게 해 주시려고, 경건의 연습이 되어야겠기에, 삶 속에서 당황하다가도 평강을 얻게 된다. 그리스도의 인자하심과 하나님의 너그러우신 사랑을 믿고 소망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