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호와 권능 아래 미디안을 쓰러뜨린 자, 기드온
성경 속의 인물 (12)
천고마비(天高馬肥)란 하늘은 푸르도록 높고 말은 통통히 살이 오르는 낭만의 계절 가을을 뜻하나 옛적 중국인들에게 이 시절은 공포의 기억이었으니 농경민인 그들이 수확하던 계절은 북방 유목민들에게는 약탈의 계절이기 때문이었다. 기력 넘치는 말을 타고 폭풍처럼 치고 빠지는 흉노를 막고자 쌓았던 만리장성은 실상 별무소용이었으며 침투왕조 후의 정복왕조들은 아예 중원을 그 지배 아래 두기도 하였다. 사사(士師) 드보라를 세우셔서 가나안 왕 야빈의 철병거로부터 건져내신지 40년, 다시금 여호와를 잊어버린 언약자손들은 미디안 족속을 채찍 삼아 때리시는 여호와께 돌이키기보다 스스로의 꾀를 의지해 산에 구멍과 굴과 산성을 조성하였으나 오히려 그들은 메뚜기떼 같이 들어온 미디안 사람들에게 땀 흘린 소산의 피탈도 모자라 종족이 진멸당할 절박함에 처하게 된다. 약탈을 피하려 포도주 틀에 숨어 밀을 타작하다가 여호와께 부름을 받은 기드온은 함께 하심의 표징을 얻었음에도 성읍 사람들을 두려워하여 야밤에 바알의 단을 헐고 아세라의 상을 찍은 뒤 여호와의 단을 세운다. 때에 미디안 등 이방 연합군이 요단을 건너 이스르엘 골짜기에 진을 치자 여호와의 신에 감동되어 군대를 소집한 기드온은 재차 구원의 확증을 원했다. 두 차례에 걸친 양털의 표적에 고무된 기드온은 그를 따르는 여러 지파와 하롯샘에 집결해 모레산에 모여든 대적 미디안과 맞닥뜨리게 되었으며, 오늘날까지 풍부한 수량의 빼어난 물맛을 자랑하는 아름다운 이 샘에서 기드온 삼백 용사의 선별이 이루어진다. 두려워 떠는 이만 이천을 돌려보내셨고, 다시 시험하여 손으로 움켜 물을 핥은 자 삼백 명만을 남게 하신 과정은 전쟁의 향방이 인간의 얄팍한 계산이 아닌 오직 전능자의 정하신 길로 귀결됨을 계시하기 위한 심오한 섭리였다. 전투 직전 여호와의 명에 따라 적진을 탐지하던 기드온은 적병의 해몽, 곧 하나님께서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의 칼날에 미디안을 붙이실 것을 엿듣는다. 행여 기드온이 두려워할까 적들의 저하된 사기까지 알게 하신 여호와의 세심한 섭리는 히브리서의 기자가 ‘연약한 가운데서 강하게 되기도 하며(히 11:34)’라 표현했듯 주저주저하던 그를 용장으로 이끄신 절대주권을 더욱 분명히 드러내고 있다. 어둠 속에서 항아리를 깨고 밝혀진 횃불, 나팔소리와 함께 여호와와 기드온의 칼을 외친 함성은 혼비백산한 미디안의 자중지란(自中之亂)으로 이어졌고 기드온은 미디안 두 방백과 두 왕을 추격해 죽이는 혁혁한 전과를 올리게 된다. 백성들의 통치 요청에 ‘여호와께서 너희를 다스리시리라(삿 8:23)’ 응답한 기드온의 신앙 고백은 살펴본 바 여호와 주권적 섭리의 결과였다. 또한, 승전 직후 시작된 기드온의 실수(삿 8:27) 역시 여호와의 정치(精緻)한 의도 가운데 있음을 확인해야 한다. 평탄의 때가 이어지면 어김없이 여호와를 잊고, 극한 상황에 몰려서야 여호와께 매달리던 ‘맞고서야 분발하는’ 우매함은 사사시대 내내 개가 그 토한 것을 도로 먹듯(잠 26:11) 한심히 반복된다. 세인들의 잣대로 보자면 무의미한 반복일 터이나 이는 한 터럭조차 인간의 의지로 주관할 수 없음을 가르치는 성경의 핵심적 의미를 담고 있다. 나의 능력으로는 대적의 도전과 육신의 소욕에 숱하게 꺾일 수밖에 없는 삶의 슬픔이나, 그 인생의 좌절 속에 오직 진리의 횃불 되신 여호와 당신만을 바라보게 하시고 나아가 영원한 승리의 찬양이 터지도록 다스리심은 세상 무엇과도 견줄 수 없는 언약백성의 기쁨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