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10-11 10:4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통치

banner

緹̿ 1

 계단 공과로 성경을 배우던 유년부 시절, 젖과 꿀이 흐르는 땅 가나안에 대한 이미지는 동화 속 감미로움과 비슷한 무엇이었다. 해변 길(사 9:1)과 왕의 대로(민 20:17)를 품은 다양한 문명의 교차로였던 이스라엘은 그 문화적 배경만큼이나 작지만 드라마틱한 지형을 품고 있다. 서부의 곡창 지대인 이스르엘 평야와 울창한 초목이 우거진 북부 갈릴리 호수는 풍요로운 낭만이지만, 남부의 네게브 사막과 동부의 거친 산지는 척박한 현실의 대조를 이룬다. 불행히 언약 백성의 주 정착지는 유대 광야를 포함한 동쪽 지대였으며, 오히려 성경은 정기적으로 범람하는 나일 강의 시기에 맞춰 손쉽게 발로 물을 대는(신 11:10) 수로를 텄던 이집트를 현상적인 축복의 땅처럼 설명한다.
 알렉산더 제국의 사분(四分)을 초래한 입소스 전투 당시 이집트를 다스리던 프톨레마이오스 1세 소테르는 알렉산더와 함께 아리스토텔레스 문하에서 동문수학하던 벗이자 다난했던 원정길을 동행한 충신이었다. 방부 처리되어 운구되던 알렉산더의 시신을 빼돌려 자신의 입지를 강화했던 그는 주전 305년경 왕을 자칭하며 헬레니즘 국가들 가운데 최장수를 누린 프톨레마이오스 왕조(305~30 B.C.)를 세운다. 기민한 판단력의 프톨레마이오스는 입소스 전투에 적극적으로 간여하기보다 오히려 코일레-시리아(오늘날의 가자 지구 및 팔레스타인)의 남부를 신속히 점거하는데, 해당 지역의 지배권에 대해 나머지 동맹자들의 지지를 받던 셀레우코스는 과거 정치적으로 빚진 일로 인해 일단 물러섰고, 이때 유대 지역도 프톨레마이오스의 치하로 들어가면서 상당수의 유대인이 알렉산드리아로 옮기게 된다.
알렉산더의 세계주의적 이상을 가장 충실히 물려받은 프톨레마이오스는 대왕의 시신이 묻힌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를 가장 찬란한 헬레니즘의 본산으로 키워낸다. 50만 이상의 인구가 거주했던 문화와 교역의 중심지에는 프톨레마이오스에 의해 세워진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이 자리했다. 지구 상 모든 민족의 책을 소장하겠다는 목표 아래 그는 엄청난 재원을 퍼부어 각지의 도서를 사들이는 한편, 몇몇 주요 도서관의 책들을 통째로 옮겨오거나 입항하는 배들의 서적을 압수해 필사한 뒤 원본을 챙기고 복사본을 돌려주는 등 온갖 수단을 동원하였다.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렇게 모여진 방대한 장서의 번역과 연구를 위해 당대의 이름난 학자들을 최상의 예우로 불러들였고, 이에 도서관은 로마에 의해 소실되기까지 세계 최고의 학술정보센터로 자리매김하기에 이른다.
향년 83세로 사망한 부왕의 계승자 프톨레마이오스 2세 필라델푸스(283~ 246 B.C.)는 선대 이래의 여러 사업을 발전시켰다. 높이 130m의 대리석 구조물 꼭대기에 이동식 거울이 달려있어 알렉산드리아 항구를 드나들던 배들의 길잡이 역할을 하던 파로스 등대를 완공하였고, 각종 정책의 재원을 조달하기 위한 중상주의적 통제무역체제를 완성시켰다. 필라델푸스는 학술의 장려에도 힘을 기울여 알렉산드리아 문예의 황금기를 이루었는데, 다소의 이견이 있으나 개종한 이방인 및 히브리어를 잊은 유대인을 위한 구약의 헬라어 번역본인 70인역(Septuagint) 작업이 그의 통치기에 시작된 것으로 본다. 주전 3세기경의 70인역과 1947년 발견된 주전 2세기경의 사해 사본의 대조 연구는 70인역의 번역가들의 히브리어 텍스트에 대한 충실성을, 오늘날 우리 손에 들린 구약의 문헌적 신뢰성을 입증하고 있다.
동서양 융합의 하나 됨을 꿈꾸던 알렉산더를 이은 프톨레마이오스 1세의 종교 정책은 오시리스와 아피스의 혼합 신 세라피스의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한 국가적 숭배였다. 자신의 왕조를 특징짓기 위한 그의 시도는 외면의 우상보다 더욱 무서운 내면의 우상숭배, 곧 언약성취의 여호와를 절대주권자로 섬기면서도 여전히 나의 공로와 가능성에 집착하는 자기중심적 선악 판단을 돌아보게 한다. 나일 강의 축복과 같은 육신의 지속적 번영은 실상 영적 시험의 고난이며, 광야의 일상과 같은 육신의 고난은 기실 형식화된 나의 틀이 무너져가는 영적 축복의 은혜가 아닐까. 질그릇은 흙으로 돌아갈, 창조주의 생기 아니면 전연 무가치한 피조물이기에 아픈 깨어짐의 과정은 그 안에 담긴 보배이신 주 예수 영광만을 드러나도록 하는 선한 인고의 시간이리라.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자유기고가

셀레우코스 왕조의 통치
포에니 전쟁과 마카비 혁명(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