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통치의 모형이 되었던 자, 다윗
성경 속의 인물 (16)
4만여 군사와 함께 피레네와 알프스 산맥을 돌파함으로 서지중해에 집중하던 로마를 혼비백산케 했던 고대의 한니발 이후, 근대 최초로 대규모의 병력을 거느리고 알프스를 넘어 북이탈리아로 진격고자 했던 전략을 부관들은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사전에 불가능이란 없음을 실천으로 보이며 카롤루스 대제 이후 천여 년 만에 유럽 통합을 꿈꿨던 나폴레옹, 러시아 원정 실패 이후 재기를 노린 그의 마지막 전투는 벨기에 남동부 워털루에서의 결전이었다. 스스로 황제에 등극하며 프랑스 혁명의 이단자 취급을 받았어도 상당수 프랑스 대중은 그를 지지했고, 불패의 근위대가 건재했던 초반의 상황 역시 유리했다. 치질로 괴로워했다는 설도 있으나 그에게 가장 뼈아팠던 것은 동시대의 빅토르 위고가 ‘하나님의 개입’이라 표현했던, 뇌전(雷電)을 동반한 폭우였다. 포병 화력을 중시했던 나폴레옹은 개전 시간을 두 시간가량 늦추었고, 이는 방어에 주력하며 프로이센군의 합류를 기다리던 영국의 웰링턴에 무릎을 꿇은 결정적 요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잠을 이기지 못했다면 그는 코르시카의 어부에 불과했으리란 모 저축은행의 코믹한 광고 카피가 떴었지만, 실상 그를 영웅으로 만들었던 건 절대왕정을 타도한 프랑스를 좌시하지 않으려던 주변 강국의 침략 위협이었다. 사울의 죽인 자는 천천이요 다윗은 만만이라는 칭송의 발원지 또한 블레셋의 위세와 대치하던 엘라 골짜기였으니, 할례 없는 저자가 누구이기에 감히 살아 계신 하나님의 군대를 모욕하느냐 외치던 빼어난 눈매를 가진 미소년의 맞상대는 대략 3미터에 육박하던 골리앗이었다. 아무도 빤한 개죽음의 길로 나서려 하지 않던 때 다윗은 맹수의 발톱에서 건지신 여호와께서 블레셋 사람의 손에서도 건져 내실 것이라는 주권자를 향한 신뢰를 웅변한다. 수없는 절박함 중 던져졌을 무릿매 줄에 냇돌을 넣어 돌리며 다윗은 만군의 여호와 이름으로 질주해 거인의 이마를 일격에 맞추었다. 쓰러진 골리앗의 칼은 다윗의 손에 들려졌고 그렇게 기세등등하던 골리앗의 머리는 허무히 베어진다.
영웅이 된 다윗을 질투하는 사울에게 하나님 장중(掌中)의 악신이 스며들고, 끈질기게 이어지던 추격에 지쳐가던 다윗에게 사울을 죽일 기회가 황량한 엔게디 광야의 한 동굴에서 주어진다. 이야말로 여호와께서 주신 날이라 부추기는 추종자들에게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이를 치는 것은 금지된 것’이라 이르던 다윗의 사려는 심판의 권한이 오직 여호와께 있음을 깨우치는, 주를 위하여 인간이 세운 모든 제도에 순복하는(벧전 2:13) 지혜로움이었다. 세 차례의 시련을 지나 반역자들이 진멸되고, 존귀와 평안과 견고케 하심의 언약(삼하 7:1~17) 아래 이방 대적들이 다윗 왕 앞에 굴복되어지던 역사는, 그의 계보에서 출현하실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모든 육신의 소욕이 복종케 될 것을 예표하고 있다.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삼상 17:47)이라던 다윗의 외침은 하루하루 치열한 삶을 지나는 신약시대의 지친 영혼들에게 깊은 울림으로 다가온다. 불가능은 없다던 나폴레옹이 대서양의 고도(孤島) 세인트헬레나에 갇힌 울분으로 지내던 중 다음처럼 부르짖던 말을 한 경비병이 들었다 전해진다. ‘나는 전능한 하나님을 감당할 수 없었다(God Almighty has been too much for me).’ 여호와 전적 주권을 모르는 이의 패배란 그저 패배일 뿐이나, 여호와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자의 패배는 장차 도래할 그리스도 영광의 승리를 더욱 바라게 하시는 섭리임을 떠올림에 성도의 긴 여유, 그리고 매 순간의 평안이 자리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