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약 배경사 산책 (2)
열조(列祖) 이전 시대의 역사(上)
서아시아뿐 아니라 유럽, 인도, 중국 및 멀리 폴리네시아, 멕시코, 페루 신화에까지 비슷한 내용으로 산재(散在)한 홍수의 전설은, 어떠한 사건이 분명 실존했다는 진실을 에둘러 입증한다. 일반 고고학과 문헌에서 이스라엘이 민족으로 등장하는 때는 B.C. 1446년경 출애굽 이후인데, 좀 더 거슬러 올라 수메르의 우르(UR)를 출발한 아브라함이 팔레스타인에 도달한 즈음의 고대 메소포타미아 역사를 시작으로 구약 기록의 배경을 간략히 살피고자 한다. 이 지역의 문명 발전은 대체로 다음 네 시기로 구분된다.
1. 고(古) 수메르 (초기 왕조시대. B.C. 3000~2350년경)
일반적으로 최고(最古) 문명의 발원지를 현 이라크의 수메르로 간주한다. ‘검은 머리 사람들’이라 일컫던 수메르인(Sumerians)은 인종이나 언어의 계통이 불분명하며, 두 강(potamos) 사이(mesos)의 메소포타미아에서 키시, 우르크, 에리두 등 여러 작은 도시 국가들을 세웠다. 쐐기 문자를 만들고 청동 문명을 발전시킨 수메르는 신의 대리자가 권력을 행사하는 신정(神政) 국가 체제였으며, 개방적 지형으로 인해 세력 교체가 빈발하던 이곳은 내일을 알 수 없는 삶이었기에 현세적 경향의 다신교가 형성되었다. 신화의 기록과 신전, 공예와 금속 세공술, 농업과 수레바퀴차 등 다방면의 유산을 남긴 이들은 특히 법이란 신의 명령을 반영한 것이라는 의식을 가졌다.
2. 아카드 왕국 (B.C. 2350~2150년경)
수메르 문명을 계승했던 이들은 셈족 계열의 아카드인(Akkadians)이었다. 수메르 도시들을 복속시켜 최초의 대통일국가를 건설한 이들은, 수메르어와 다른 아카드어를 사용했으나 기록 시에는 수메르인의 문자를 사용해 쐐기무늬가 새겨진 점토판을 남겼다. 왕국이 수립되면서 남부 메소포타미아[바빌로니아] 지역의 남과 북이 각각 수메르 및 아카드로 구분되었는데, 제국의 건설자 사르곤(Sargon) 1세의 50여 년 치세동안 페르시아만에서 지중해까지 영토가 확장되고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 체제가 다져졌다. 4대 나람신(Naram-Sin)은 반란을 수습하고 왕조의 최전성을 구가했으나, 이후 제국은 중앙 집권력의 약화 이후 이란고원에서 내려온 구티족(Gutians)에 의해 멸망한다.
3. 신(新) 수메르 (우르 제3왕조. B.C. 2135~2027년경)
100여 년간 지속된 구티족의 암흑시대 이후, 수메르 문화 부흥을 위한 노력은 우르남무(Ur-Nammu)의 왕국 건설로 결실을 이룬다. 그는 함무라비 법전보다 앞선 최초의 우르남무 법전과 더불어 현존 최고인 우르의 지구라트[聖塔]를 남겼고, 제국의 왕들은 ‘수메르와 아카드의 왕’을 자칭하였다. 귀족 및 성직자, 평민, 노예의 세 계급으로 나뉘었던 우르는 무역과 상업의 요충지이자 달의 신 난나(Nanna)를 수호신으로 받들던 이방 종교의 중심지이기도 했다. 이같이 우상 숭배가 성행하던 도시에서 복의 근원이 될 선민의 시조를 이끄신 섭리는 일방적 은혜로 계시되는 여호와의 절대 주권을 일깨운다.
4. 고(古) 바빌로니아 (B.C. 2000~1600년경)
우르 제3 왕조를 무너뜨린 이신(Isin) 외에 라르사(Larsa), 마리(Mari), 아시리아(Assyria) 등이 벌이던 각축전은 셈족 계통의 ‘서쪽인‘ 아무르(Amurities. 혹은 아모리)인의 메소포타미아 석권으로 마무리된다. 기존 수메르와 아카드의 문화와 종교를 상당 부분 수용했던 이들은 제1 왕조의 6대 함무라비 치세인 18세기 무렵, 열거된 세력들을 아우르고 문화적 번영을 이룩하지만, 16세기에 아리안계의 히타이트인(Hittites)에게 무너진다. 동해(同害) 보복법인 함무라비 법전을 비롯하여 창조와 홍수의 서사시, 학술 논문, 외교 문서 등 여러 기록의 존재는 당대를 살았던 아브라함 역시 후대의 기자(記者) 모세에까지 전승된 기록을 남겼으리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한편 1898년 옥스퍼드의 아시리아학 권위자 세이스(A.H. Sayce)는 함무라비 시대의 비석에서 ’여호와는 하나님‘이라는 글의 발견을 발표하였으며, 독일의 슈미트(W. Schmidt)는 다신(多神)적 애니미즘에서 일신 신앙이 발전된 것이 아니라 유일신 신관(神觀)이 애초의 모든 원시 종족 사이에 있었음을 주장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