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4-06-06 08:45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출애굽 시대의 이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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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로 거슬러가는 연구일수록 얼마나 그럴듯한 소설의 재구성인가에 달려있다던 학부 시절 교수님의 농반진반은 새길수록 의미심장한 코멘트였다. 구약 역사 초기의 고증에 있어 난해한 쟁점 가운데 하나가 출애굽의 연대인데, 이는 당대 이집트의 주 기록 매체인 파피루스의 열악한 보존성과 더불어 그나마 전해지는 문헌에서도 이방 민족일 뿐인 이스라엘의 체류와 탈출에 대한 내용이 전무함에 기인한다. 언급된 바 주전 13세기부터 이스라엘사를 다루는 일반 근동 역사는 출애굽 기사를 거의 취급하지 않으며, 따라서 성경 본문을 제외하고는 고기물(古器物)에 의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은 일층 출애굽의 역사를 아득하게 한다.

12왕조기로 여겨지는 요셉의 애굽 체재(滯在) 중 성경 이야기들은 이집트의 실제 풍습 및 제도와 다수 연관되며, 특히 주전 13세기경 쓰인 것으로 추정되는 ‘두 형제의 전설’에 나타난 보디발 아내의 유혹과 흡사한 내용은 요셉의 역사가 전승을 통해 후대까지 이어졌을 가능성을 보여 준다. 이후 13왕조의 약화는 힉소스(Hyksos)인의 침투를 야기했고, 철제 무기와 복합식 활의 위력에 기마 전차의 기동력까지 갖춘 그들은 100여 년 넘도록 수도 아바리스를 포함한 이집트 델타 지역을 장악하였다. 아포피스의 위협에 맞서다 두개골에 3개의 구멍이 뚫린 참혹한 미라가 된 남쪽 테베 17왕조 세케렌네를 이어 분기한 후계자 카모세의 사후, 동생 아흐모세는 힉소스를 축출하고 나아가 가장 강성했던 제국의 서막을 열었다.

성경은 요셉의 총리 시절부터 열 재앙에 이르는 기간 어느 바로의 이름도 밝히지 않는다. 출애굽 시의 군주로 18왕조의 아멘호텝 2세와 19왕조의 람세스 2세가 주로 거론되는데, 대체로 출애굽 전기설(15세기) 또는 출애굽 후기설(13세기)이 여기에서 결정된다. 970년경 즉위한 솔로몬이 성전 건축을 시작한 해는 왕 4년인 966년으로 파악되며, 이는 애굽을 벗어난 지 480년이므로(왕상 6:1) 출애굽 연도는 1446년으로 계산된다. 전통적 전기설을 따르자면 아멘호텝 1세(혹은 투트모세 1세)는 히브리 남아를 하수에 던지라 명했을(출 1:22) 것이며, 정실 태생임에도 후궁의 배다른 소생 투트모세 2세의 비에 머물렀으나, 남편 사후 의붓아들 투트모세 3세의 섭정으로, 남장에 수염을 달고 이집트를 거머쥔 하트셉수트는 공주 시절 히브리 아이를 대담히 물에서 건져 양자로 삼았을(출 2:10) 것이다. 강팍이건 자애이건 마음의 많은 계획이 있을지라도 결국 성취됨은 여호와의 뜻뿐임을(잠 19:21) 성경은 밝히 선언한다.
하트셉수트가 죽자 법적 모친의 종적을 파괴하고 내치에서 외정(外征)으로 전환한 ‘이집트의 나폴레옹’ 투트모세 3세는 지중해 연안 우가릿부터 유프라테스 강 골짜기까지 17차례의 원정을 통해 고대 근동의 최강자로 군림하였고, 그 계승자 아멘호텝 2세 때에 출애굽의 역사가 이루어진다. 열 번째 장자 죽음의 재앙에 굴복했던 바로가 아멘호텝 2세라는 추측은 그의 아들 투트모세 4세가 세운 꿈의 비문(Dream Stele)과 연계되는데, 장남이 아니었으나 스핑크스로부터 다음 군주가 되리라는 예언을 들었다는 신이적(神異的) 권위의 부각은 예기치 않은 변고로 바로가 결정되었음을 암시한다.
몰살의 절망 가운데 건져 올림의 희망을 비추셨던 여호와, 궁정의 촉망받는 왕자가 아닌 광야의 혀가 둔한 노인을 세워 제국의 절정기에 도전케 하셨던 여호와 섭리의 깊은 의미를 헤아려 본다. 헤세드(chesed)와 에메트(emeth), 언약적 사랑에 신실하신 여호와께서 시험당할 즈음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능히 감당하게 하셨던 수많은 전적 주권의 역사는, 오랜 경건의 연습을 통해 오직 당신만을 경외케 하시는 그리스도의 겸손으로 우리를 이끌 것이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이재규 집사(자유기고가)

40년 광야 노정의 이유
열조시대의 생활과 관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