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년 광야 노정의 이유
구약 배경사 산책(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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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0년 6월 25일 새벽 4시경, 평화를 원한다면 전쟁을 준비하라던 로마의 전략가 베제티우스의 지침과는 한참 동떨어졌던 한국에 악몽 같은 일요일이 찾아든다. 스탈린과 모택동의 동의 아래 만반의 채비를 갖췄던 북한에 속절없이 밀리다 인천에서의 대반전 이후 10월 1일(국군의 날) 38선을 돌파한 남한군은, 동월 26일 최선봉 청성부대가 압록강 초산에서 수통에 물을 채우는 감격을 누리나 곧 통일의 꿈은 눈앞에서 허망이 멀어지게 된다. 우리 현대사에서 가장 확인하기 싫은 장면 중 하나일 중국군의 개입처럼, 약속받은 성지를 지척에 두고 언약에 불순종한 죄로 한 세대가 몰락해야 했던 가데스 바네아 사건은 그 후 40년 가까운 시련을 겪게 된 출애굽의 선민에겐 꿈에라도 떠올리기 싫은 기억이었을 것이다.
요세푸스의 표현을 빌자면 눈으로 바라보는 것조차 고통스러웠다던 시내 산은 여호와의 신이 계신다는 항설로 두려움의 대상이자 감히 범접할 수 없던 장소였다. 현 시내 반도 남단의 제벨 무사(Jebel Musa), 곧 모세의 산으로 통칭하는 해발 2,285m의 풀 한 포기 없는 이곳을 증거판이 수여된 곳으로 보는 견해가 주조를 이루나 계속된 발굴에도 산 주변에 백성이 정착했던 구체적 흔적은 발견되지 않았다. 이외에 반도 북쪽 라스 에스사프사페(Rases-Safsafeh. 1,993m)를 지지하는 설은 거대한 출애굽 인구를 수용할 공간이 가능하다는 이유에 기초한 것이며, 또한 아라비아 반도에 시내 산이 있다는 주장도 최근 제기되었다. 시내 반도 밖으로 나간다면 홍해는 수에즈 만이 아닌 아카바 만이 되는데, 이 경우 가데스 바네아까지의 열 하룻길(신 1:2)이 어색해지는 난점과 더불어 전통적 출애굽 경로와 관련된 성경 내 여러 지명과의 조화 문제가 대두된다.
시내 산의 위치를 천명하는 성경의 기록은 실상 불분명하나 어떠한 역사적 유적 혹은 사건이 제시된다 하더라도 최우선으로 고려할 것은 결국 성경 본문과의 조화 여부일 것이다. 야곱의 식솔 70명(창 46:27)이 보행하는 장정만 60만(출 12:37)으로 불어난 기적적인 자손 언약 성취의 사실을 두고 진보주의자 다수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더라도 그 숫자를 대폭 깎아내린다. 가축과 가재도구까지 거느리고 불모지를 횡단하며 생존할 수 있는 무리는 작은 집단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역사는 역사로, 신앙은 신앙으로 보아야 한다는 이들은 라암셋과 숙곳 사이의 40km를 생필품 일체가 포함된 거대 행렬의 길이 3,000km가 75열 종대로 늘어서는 아이러니를 지적하며 성경 기사의 신뢰성을 공격한다.
한편 출애굽 사건으로 타격을 받았을 아멘호텝 2세의 치세(1450-1412)를 살피면 총 세 번의 전쟁이 치러지는데 마지막 전쟁은 비교적 작은 규모였으며 특히나 후반기에는 이렇다 할 군사적 움직임이 없다. 나아가 주전 15세기 정점을 찍었던 이집트의 국력이 이후 점차 하강기로 접어드는 역사적 흐름을 설명할 때, 특별 병거 600대를 비롯한 막강한 군사력이 한꺼번에 수장된 홍해 기사(출 14:28) 및 전술(前述)한 250만 가까이로 추정되는 경제 인구의 급작스런 탈출을 그 배경으로 주목하는 학설도 있다. 어찌 되었건 일반 학문과 성경 본문을 연계하려는 이성적 노력이란 부정이건 긍정이건 일정한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음을 직시하게 된다.
불순종의 옛 사람이 그득했던 광야의 죄 된 역사가 신약 시대 성도의 내면에 교만과 탐욕으로 이어져 자리한다면, 사람의 유전과 세상의 초등 학문은 외면의 도전으로 작용한다. 자손 번창의 기적, 홍해의 기적, 구름 기둥과 불기둥의 기적, 만나와 메추라기의 기적 등을 그 자체로 받지 않고 합리적으로 설명하려는 이들은 독단적인 태도를 내버리고 이성을 존중하는 자리에서 과학 위에 성립될 수 있는 보다 높은 신앙을 찾으라고 고상하게 권면한다.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때로 세상의 학문을 배우게 됨은 적을 앎으로 위태롭지 않게 하심이나 더욱 중요한 것은 지기(知己)가 아닐까. 평화로운 말씀 상고의 때에 치열한 영적 전쟁을 예비해야 하는 이유, 계시 중심의 일관된 논리구조 아래 성경 본문에 대한 지식을 매일의 양식처럼 먹고 또 먹어야 하는 이유는 단 하나, 일점일획도 가감할 수 없는 살아계신 여호와의 말씀으로 성경을 지키고 전하기 위함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