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나안의 문화와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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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민사상과 율법을 골자로 하는 유대교를 탈피한 기독교는 믿음·소망·사랑의 인간적 가치를 강조함으로 민족종교가 아닌 세계종교가 되었다는 이론은 세계사 수업의 일반적 설명이다. 히브리어 메시아가 헬라어로 번역된 그리스도의 한자 가차(假借)가 기독(基督)이듯, 신의 아들로 자처한 예수 이후 스토아 철학을 교리적 배경으로 하여 형성된 기독교가 쿠데타로 집권한 콘스탄티누스의 정치적 안정을 위한 노림수와 맞아떨어지며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가 되었다는 서술은 비(非)기독교인에겐 자연스러운 사실로 받아들여진다. 몇 년 전 모 철학자는 구약이란 민족 신 야훼가 오직 자신만을 믿는 조건으로 가나안 입성을 약속한, 유대인만을 대상으로 한 계약이기에 폐기되어야 한다는 구약 무용론을 내세웠다. 구약을 믿는 것은 성황당을 믿는 것과 같다던 그의 주장은, 이미 초대 교회 당시 구약성경은 필요없고 신약만으로 충분하다며 출현했던 신구약 분리의 이단과 유사한 것이었다.
금송아지 사건의 날에 각각 자신의 아들, 형제, 친구를 도륙했던(그 살해로 여호와에 대한 헌신의 칭찬과 복의 약속을 얻었던) 삼천이란 숫자나 동족끼리의 싸움으로 당일에 몰살당한 베냐민 지파 이만 오천일백이란 숫자는, 신약의 용서와 사랑과 상이한 심판과 진노의 신으로 구약의 하나님을 간주하는 회의론자들의 견해에 얼핏 힘을 싣는다. 약속하신 가나안 정복 중에 기업으로 주신 민족들의 성읍에서 호흡 있는 자를 하나도 살리지 말라는 여호와의 준명(신 20:16)이나 그 모든 왕을 쳐서 하나도 남기지 않았던 여호수아의 준행(수 10:40)은, 그 지역의 신들이 언약백성에게 올무가 될 것을 생각하심이었다. 모형적인 땅 언약 성취 섭리를 토라 및 사사기에만 천착해 이스라엘을 위한 구속(救贖)으로만 보자면 구약의 하나님은 잔인무도의 신이 맞을 듯하나, 신구약 전체의 통일적 논리에 주목하여 여호와 이름을 위한 계시(啓示)로 본다면 그는 택자들의 찬미를 이끌어내시는 전능자일 것이다.
가나안 지역의 초기 청동기 문화를 파괴하고 중기 청동기 문화를 건설한 주역은 아모리족이었다. 창세기에 가나안의 아들로 적힌 이들은 몇 세기를 거치면서 후기 청동기 시대에는 주변 민족과 동화되는데, 성경에서도 다윗왕국 이전의 팔레스타인 주민으로 가나안인과 아모리인을 대개 구분없이 혼용한다. 신명기 7장 초두에서는 좀 더 세분된 가나안 일곱 족속을 설명하고 있는데, 이러한 넓은 개념 외에 좁은 개념의 가나안이란 키나후, 곧 자줏빛 염료와 관계된 페니키아인을 뜻한다. 시돈, 두로 등을 거점으로 해상무역에 능했던 이들의 가장 유명한 업적은 알파벳의 보급이며, 그리스인들이 이들의 알파벳을 받아들인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밭 갈던 농부의 우연한 발견에서 비롯된 라스 샴라(Ras Shamra) 문서는 출토된 1400여 점의 점토판에 쓰인 것으로, 설형문자 알파벳 외 다양한 언어로 기록된 주전 14세기의 문서들은 언약자손의 정복 당시 가나안 지역의 문화상을 말해준다.
점토판에서 찾게 된 해당 도시의 고대 명칭을 따라 우가리트(Ugarit) 문서라고도 하는 이 자료들은 이스라엘의 가장 큰 도전 중 하나였던 바알과 관련된 신화와 서사시를 담았는데, 이는 여호와께서 내리신 진멸의 명령을 이해하게 한다. 가나안의 최고신 엘과 아세라의 아들로 태어난 바알은 풍요의 상징으로 널리 섬겨졌는데, 아낫 혹은 아스다롯을 배우자로 했던 바알 숭배를 가장 선호했던 거주민들은 구름과 비가 그에 의해 운행된다고 믿었다. 뒤섞인 70여 남녀 신을 배경으로 했던 바알의 난잡한 가계(家系), 제의 과정에서 다산을 기원하며 자행된 온갖 성적 타락, 칼로 자해하며 비를 구하고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치던 행위 등 물질적 번영을 구가한 가나안 문화에 뒤따른 심각한 종교적 부패는 용서없는 멸절을 명하신 배경이었으며, 이는 재림하실 승리의 날까지 비(非)진리와의 대립에 타협없이 맞서도록 고무하시는 신약 성도의 영적 투쟁으로 이어지고 있다.
생육하고 번성하라 이르신 여호와의 땅 언약에 대한 도전처럼 바알은 결실과 번식, 나아가 자손의 번창까지 주관하는 전능한 영웅으로 섬겨졌다. 카르타고의 명장 ‘바알의 은총’ 한니발이 아홉 살 때 부친의 손에 끌려 로마 타도를 다짐했던 곳은 바알 신전이었고, 이후 페니키아의 바알은 그리스의 제우스, 로마의 주피터로 동일시되기에 이른다. 테오도시우스는 기독교를 국교로까지 승격시키나, 박해와 순교 속에 순수했던 믿음은 이때부터 변질되기 시작하였다. 언약대로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 또한 언약대로 배부르고 살쪄 여호와를 멸시하고 배역했던 역사는, 왜 지상교회가 불완전한 모습일 수밖에 없는지, 왜 때로 어둠의 권세에 좌절해야 하는지, 왜 오직 성경만을 최상의 권위에 두고 끊임없는 개혁으로 낮아져야 하는지를 생생한 교훈으로 깨우쳐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