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이스라엘 역사의 종언
세 대륙이 교차하는 지리적 요충지의 서남단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은 강대국 간의 부단한 주도권 쟁탈 가운데 야심가의 발굽이 늘 거치던 고단한 곳이었다. 고대 근동의 여러 패자들은 정하신 때를 따라 이 지역에 압박을 가해왔으며, 이는 초강대국에 둘러싸인 현대까지 920여 회 넘는 외침을 겪었던 우리의 지나온 여정과 흡사하다. 함석헌 선생이 한국사를 ‘수난의 여왕’이라 표현한 것을 두고 이즈막에 새삼스런 논쟁이 불붙었지만, 고난은 인생을 심화하고 역사를 정화한다는 그의 통찰은 역사철학의 깊은 표현으로 음미할만하다. (효율성이라는 명분으로 포장된 탐욕의 우상이 지배하는 자본주의의 구조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원조를 받던 폐허가 원조를 베풀게 된 사상 초유의 국가로 올라선 기적은 언약하신 복음의 순행에 따라 이 땅을 말씀으로 타오르게 하신 축복 속에 내리셨던 은혜 아니었을까.
많은 도시들이 왕의 권력에 고분고분하지 않던 아시리아의 내분을 종식한 자는 풀(Pul) 혹은 풀루(Pulu)라는 이름을 가졌던 디글랏빌레셀 3세였다. 지방 권력의 힘을 제한하고 왕권을 일층 강화한 그는 내부 문제를 추스르고 군대를 재정비한 뒤 매해 대외 원정을 감행하였다. 중세 아시리아 이래의 국경선을 넘어서는 팽창이 시작되면서 억압하여 조공을 받아내던 9세기의 정책은 점차 말살 책으로 변화되었고, 남쪽의 바빌로니아, 남동쪽의 엘람, 북쪽의 우랄투, 복속된 팔레스타인 너머 이집트와 국경을 맞댄 아시리아는 7세기까지 강대국들의 수도를 제압해 갔다. 다만 유프라테스 강 서부 아나톨리아 및 팔레스타인 지역은 무역을 위한 완충지대 역할을 위해 굳이 직할지로의 편입이 선호되지 않았고, 반란 등 불가피한 때에만 제국 내 체제로 통합되었는데, 이 경우에도 전략적인 단계를 거치며 진행되었다.
토착 왕이 조공을 바치며 왕위를 유지하는 속국 단계, 기존 왕위를 박탈하고 꼭두각시를 세우는 괴뢰국 단계, 최후로 총독을 파견해 직접 통치하는 합병 단계를 가장 잘 보여준 사례가 북이스라엘의 멸망과정이었다. 강력했던 여로보암 2세를 계승한 스가랴가 6개월 만에 살룸에 의해 피살됨으로 예후의 자손이 4대를 이어가리라는(왕하 10:30) 여호와의 말씀은 정확히 성취된다. 예후 왕조를 쓰러뜨린 살룸 역시 한 달 만에 므나헴에게 시해되는데, 그는 743년 침입해 온 아시리아 왕 불, 곧 디글랏빌레셀 3세에게 정권 유지를 위한 조공을 바쳤다. 그의 아들 브가히야는 반(反) 아시리아 성향의 베가에 의해 암살되었고, 이후 아람의 르신과 이스라엘의 베가에 의해 공격당한 유다왕 아하스가 난국을 타개하고자 디글랏빌레셀의 신하를 자처하며 아시리아의 원정을 요청하기에 이른다.
돌아온 디글랏빌레셀은 가사를 정복해 이집트의 개입을 막고 저항의 본거지 아람(시리아)의 다마스쿠스와 이스라엘 북부 지역을 제국의 영토로 완전히 편입시켰다. 친 아시리아 왕 호세아는 아시리아에 막대한 조공으로 충성하며 합병을 모면하나, 그리 신뢰할만한 꼭두각시가 아니었던 그는 바빌로니아의 반란으로 혼란한 틈을 타 조공 헌납을 중단하고 이집트에 손을 내밀게 된다. 725년 바빌로니아를 진압한 살만에셀 5세는 3년여의 포위 끝에 수도 사마리아를 함락시켰으며, 이어 상당수의 이스라엘 백성이 뽑혀 북동 시리아와 서부 이란 등지에 강제로 이주당하였다. 아시리아의 인구 혼합 정책에 따라 사마리아는 다른 지역에서 유배된 종족으로 채워졌으며, 이에 이방인과 뒤섞인 불결한 ‘사마리아 족속’이 형성되었다.
멸망 후 혼합주의적 제의까지 성행되며 영영 여호와께서는 에브라임 산지 사마리아 도성을 버리신 듯 보였다. 본질상 같은 진노의 자녀인 처지임에도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의 역사적 수난과 아픔을 경멸하였다. 그러나 ‘에브라임이여 내가 어찌 너를 놓겠느냐(호 11:8)’ 이르신 여호와의 언약은 유대인의 전통을 과감히 깨고 사마리아 여인에게 세상의 구주를 알게 하신 그리스도 사랑의 복음으로 성취되었다. 부분 아닌 전체의 의미로 볼 때, 북이스라엘의 끝장난 파멸은 이방 땅에도 여호와의 영광을 선포하기 위한 거대한 섭리의 서막일 것이며, 여섯째 남편을 알던 추함은 죄가 더한 곳에 영생의 은혜가 더욱 넘쳐 신령과 진정의 아름다운 영적 예배로 찬양케 하심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