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에니 전쟁과 마카비 혁명(1)
문제의 제기
바벨론 포로기(B.C 586) 이후 스룹바벨 성전 완공기(B.C 516)까지 70년 동안 유대 공동체는 정체성의 위기와 기회가 교차하는 시기였다. 시드기야 사망 이후부터 유대 공동체는 디아스포라 공동체로 삶의 정황이 글로벌화하는 시기를 맞이한다. 고레스2세의 귀환칙령으로 고토 예루살렘으로 귀환한다. 바벨론 포로기 중에 형성된 공동체는 성서나 제한없는 상황에서 종교학교인 회당이 등장하였으며 안식일마다 정기적으로 회집되었던 회당에서는 기도와 찬송, 그리고 율법 해석 등 예배적인 모임이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변화는 제사장 권한의 위치에서 율법교사가 전면에 나서는 동기가 되었다. 그와 동시에 안식일의 중요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안식일에 율법교사들의 강론을 들었고 야웨께 드리는 예배가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결속을 할례의 관습화를 통하여 이방 공동체와 구별하는 척도로 사용되었다. 이러한 선민신앙의 종교 관습은 성전중심 의식중심에서 토라중심, 회당중심 예배의 법규로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까지 이어져 온다. 국가가 사라지고 왕정제도가 폐지되었으며, 계시의 시대가 침묵의 시대로 오랜 기간 계속된다. 필자는 이러한 기간 동안 유대 신앙공동체를 다시금 랍비중심, 야웨니즘 공동체로 회복시킨 마카비혁명 불씨를 확산시킨 간접적 영향을 끼쳤던 포에니 전쟁에 대한 연관성을 집중 조명하는데 이 글의 목적을 두었다.
동방원정의 영웅 알렉산더 대왕이 바벨론에서 사망하자(B.C 322) 헬라제국은 4개의 지역으로 분할되었다. 이 시기에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동쪽으로 세력을 확장하기 시작하였다. 이탈리아 반도는 남쪽에 자리잡고 있는 시칠리아 섬을 놓고 페니키아 식민지였던 카르타고와 영토 분쟁에 대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시칠리아 섬은 이탈리아 반도 남쪽에 있었다.
카르타고는 아프리카 북부 튀니지에 있는 기원전 9세기 말 페니키아가 세운 식민지였다. 이 지역은 지중해 가운데 위치하고 있어서 일찍부터 상업과 무역이 발전하였다. 광대한 평야는 기름져서 식량을 자급자족 할 수가 있었다. 이러한 풍요는 기원전 6세기경에는 서(西)지중해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가 되는 동기가 되었다. 이러한 카르타고의 포에니 전쟁이 마카비 혁명에 끼친 영향에 대한 원인을 연구의 목적으로 논지를 전개할 것이다. 셀레우쿠스 왕조와 신흥로마 세력과 카르타고는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인가? 이러한 역학관계가 이 글의 중요 목적이 될 것이다.
기원전 323년 알렉산더 대왕이 바벨론에서 갑자기 사망하자 기원전 315년 4명의 장군이 헬라 제국을 4등분하기 시작하였다. 안티고누스는 지중해로부터 중앙아시아를, 카산더는 마케도니아를 프톨레미 라기는 이집트를, 리시마쿠스는 트라키아를 지배하였다.
이렇게 분할된 가운데 프톨레미 장군 휘하에 셀레우쿠스 니카드(BC 312-280)부관은 후일 역사의 흐름을 바꾸는 인물로 등장한다. 그리고 당시의 안티고누스 장군은 가장 강력한 카리스마를 소유한 장군으로 알렉산더 대왕의 직계후계자가 될 야심을 가지고 영토 확장에 집념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을 감지하였던 프톨레미는 다른 분할장군들과 동맹을 맺고 권력의 무대에 등장한다. 프톨레미는 안타고누스에게 아나톨리아 지방을 넘기라고 요구하였다. 들어줄리 없는 그를 향하여 선전포고를 하고 셀레우쿠스 장군이 지휘하는 프톨레미 휘하의 군대가 가자에서 안타고누스 장군의 아들 데메트리우스가 이끄는 안티고누스 군대를 격파하였다(B.C 312).
이때부터 안티고누스의 강력한 영향력이 서서히 사라져 버린다. 그후 근동의 세력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조와 가자전쟁의 영웅 셀레우코스 니카드가 지배 하게 되는 수리아 지역의 셀레우쿠스 왕조로 양분되어 근동세력의 패권자가 되며 후일의 역사의 흐름을 로마 패권시대로 이어지는 가운데 팔레스타인 지역과 유대공동체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치는 동기가 된다.
페니키아인들은 가나안 인들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셈족 계열의 민족이었다. 그들은 창조성은 모자랐지만 다른 민족의 장점 등을 응용할 줄 아는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종교는 몰록 신에 대한 인신 희생과 음란한 다산(多産)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함께 전문화된 수공업, 그리고 지리학과 항해술에 탁월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들은 북아프리카의 카르타고, 시칠리아 섬의 페레스몬, 벨레아레스 제도 그리고 에스파니아의 카디스와 말라가에 그들의 식민지를 건설하였다. 페니키아인은 유리 및 금속산업으로 그리고 근해의 연체동물에서 얻어지는 자주 및 염료로 고대세계에서는 널리 알려져 있었다.
그들은 또한 밤에 별을 이용하여 항해를 할 수 있을 정도로 항해술이 발전하였다. 고대에서는 북극성을 페니키아의 별로 알고 있을 정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