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학(성서고등비평학) 비판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특별기획 심층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성경권위를 훼손하는 역사비평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여 성경신학이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교계에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공관복음(共觀福音)은 마태, 마가, 누가가 기록하지 않았다?
객원기자 역사비평가들은 마태, 마가, 누가가 복음서를 기록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마태는 아람어를 사용하는 갈릴리 시골 출신이며 자기 동족 유대인에게 미움받는 세리(稅吏)였던 자가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했을 리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가와 누가는 바울의 선교 시대와 관련된 인물들이므로 예수님의 일생을 목격한 자가 아니기 때문에 사실 기록 측면에서 증언의 신빙성이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비판들 모두가 성경에 대한 이해를 세상 문헌을 이해하는 정도의 상식과 추측의 틀에서 보기 때문에 발생하는 어리석은 판단으로 보입니다. 공관복음의 원저자는 ‘성령 하나님’입니다. 물론 이 명제를 확증하려면 우선 공관복음의 논리적 통일성을 해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저와 우리 연구생들은 성경신학학술원 원로가 쓰신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특히 ‘성경강론 13~15권’에서 이것을 분명히 확인한 바 있습니다.) 총서 전부를 소개할 수는 없어서 단지 단편적으로만 역사비평가들의 주장을 비판할 수밖에 없네요. 예수께서 하신 말씀(마 10:18~19, 요 15:26)에 의하면 제자들이 이방의 통치자나 임금에게 잡혀갔을 때 그 상황에서 대답할 수 있는 적절한 말이 생각나게 되어 있습니다. 즉 복음을 전할 때나 그리고 후에 성경을 기록할 때나 성경은 제자들이 아닌 하나님의 능력(말씀의 운동력, 히 4:12~13)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열두 살이었던 예수(눅 2:42)께서 성전에서 유대인 종교지도자들에게 한 놀라운 대답과 지혜를 두고 ‘몇 살부터 어디에서 누구에게 하루 몇 시간씩 구약과 아람어와 히브리어와 헬라어를 배웠을까?’를 묻는 것은 한계가 있는 우문(愚問)일 것입니다. 물론 궁금한 사항일 수도 있어요. 마찬가지로 성경 기록자가 직접 목격한 사도이건 사도한테 전하여 들은 기록자이건 기자들의 사적인 배경들은 역사적으로 고증할 수는 없는 부분이며 또한 성경 권위를 확증하는데 결정적인 물음도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 권위는 원저자이신 보혜사 성령께서 확증하신다는 것밖에는 확실한 전제는 없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러한 점에서 복음서 전체, 나아가 성경 전체가 모두 하나님의 존재를 증명하는 논리적 체계에 바탕을 둔 완벽한 구조를 가지고 있느냐를 아는 것이라고 봅니다.
H연구생 역사비평가들이 복음서 기록자들을 저자(著者)로 보려는 것은 성경에 대해 마치 어린아이와 같은 접근이거나 아니면 성경 권위를 애초부터 훼손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기자들의 기록 배경이나 환경을 몇 가지 가정과 추측으로 문제 삼는 것은 역으로 성경에 대한 이해가 얼마나 순진하고 이해력 부족한가를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 성경의 원저자이시기 때문에 복음서 기자에 대한 역사비평가들의 논란은 성경진리를 이해하는 핵심에서 벗어나 보입니다. 이러한 논란에 대해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은 성경 저자 문제에 대한 종지부를 찍었다고 봅니다. 왜냐하면 좀 전에 말씀드린 원로님의 성경강론 13~15권은 복음서 첫 장 첫 절부터 마지막 장 마지막 절까지 논리적으로 하나님의 계시 기록이며 원저자는 오직 보혜사 성령 하나님이심을 확증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2. 기록자가 ‘삼인칭’으로 되어 있어서 기자는 제삼자다?
G연구생 성경 권위와 직결되는 이러한 문제들을 대하면서 우리 모두 충분히 무장되기 위해서는 역사비평학에 비판을 가할 수 있을 질문과 더불어 분명한 성경 근거로 정확한 대답을 할 수 있어야 한다고 봅니다. 저도 복음서의 신적 권위와 관련된 중요한 부분을 하나 더 첨가하고 싶네요. 기록한 자들에 대한 시시비비의 문제는 복음서 내지 신약성경 전체를 인간 중심적 상식과 감정과 사상에 맡겨 성경의 권위를 인간의 이성적 판단에 의한 권위로 평가절하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그리고 역사비평가들이 상식과 가정과 억측으로 성경의 내용을 뽑아 모순이라고 지적하는 것 자체가 성경 권위의 반증으로 보입니다. 왜냐하면, 이른바 몇 가지 가정과 이론에 근거하여 마치 학자의 눈으로 치명적인 모순처럼 지적하면 성경권위가 훼손된 것처럼 보이지만, 이것이 제게는 세상 지식에 속한 ‘학자의 눈’으로 보면 결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없다는 생각을 역으로 증명하고 있는 중요한 예로 보입니다. 성경 내용을 많이 아는 학자라고 해서 동시에 그 지식이 성경권위를 더욱 확증한다고 볼 수 없다는 점도 말씀드리고 싶어요.
또한, 역사비평가들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에서 만약 기자가 마태와 요한 자신이라면 자신이 일인칭 주어가 되어 자신이 보았고 증거 한다고 하면 되는데, 왜 ‘삼인칭’으로 자신을 표현했는지(마 9:9; 요 21:24)를 지적하면서 마태와 요한이 아닌 다른 사람이 기록했다고 비판합니다. 오히려 저는 그들의 주장을 역으로 전환해서 성경의 권위를 주장하려고 합니다. 성경이 인간 기자들의 기록이 아닌 보혜사 성령 하나님의 사역의 결과임을 보여주기 때문에 삼인칭으로 기자 자신도 객관화시켰다고 봅니다. 다시 말해 성경의 원저자가 하나님이 분명하기 때문에 기록한 인간의 권위는 결코 중요하지 않다는 말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예를 성경의 첫 내용인 구약부터 확인할 수 있습니다. 이른바 ‘모세 오경’을 보면 모세는 자기 이름을 삼인칭으로 기록하고 자신의 죽음까지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의 기자로 알려진 여호수아도, 사무엘상·하의 기록자인 사무엘도 자신을 삼인칭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 방식의 증거들은 성경을 인간의 기록물이 아니라 바로 하나님의 말씀임을 증거 하는 증명방식이라고 봅니다. 이렇게 보면 마태복음과 요한복음도 일인칭이 아니라 반드시 삼인칭으로 기자를 기록해야 마땅하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3. 예수와 삼 년 동안 함께 겪었던 많은 사건이 어떻게 몇 시간 분량일 뿐인가?
J연구생 복음서의 권위 문제를 해명하는 것은 우리 시대에 참으로 중요한 성경권위 전수를 위한 투쟁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러분이 말씀하신 것처럼 역사비평가들은 자신들이 볼 때 성경은 이해할 수 없는 모순이 많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라고 솔직히 대답을 하면 좋은데, 모르기 때문에 진리가 아니라고 주장합니다. 자신들의 무지를 두 번 드러내 스스로 무지함과 몰지각함을 인정하는 꼴입니다. 저는 그들의 다른 주장에 대해 성경권위 중심에서 비판하고자 합니다. 역사비평가들은 제자들 특히 마태복음이나 요한복음의 경우에 기자들이 예수님과 3년 동안 동고동락하며 무수한 경험을 했는데 어떻게 몇 시간이면 다 읽을 수 있는 분량밖에 되지 않느냐고 비판합니다. 그리고 동일한 사건에 대한 해석도 서로 다르다며 복음서는 후대에 각각 다른 저자에 의해 쓰인 문서의 수집물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이에 대해 저는 요한복음 21장 25절을 소개하면서 비판하고자 합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일이 이 외에도 많으니 만일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 역사비평가들이 이 구절을 아는지 모르겠습니다. 극단적인 문서설자들은 이 말씀조차도 조작된 것으로 봅니다. 처음부터 믿지 않으려는 그런 자들에게까지 대답해야 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이 시대에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알고자 하는 믿음의 형제들에게 호소하는 심정으로 말씀드리고 싶네요. 사복음서 분량이 비슷하게 정해진 것은 기자들이 정한 것이 아닙니다. 앞의 말씀으로 보면 분량을 정하신 분은 ‘성령 하나님’입니다. 기록해야 할 필요가 있는 핵심적인 부분을 기자들로 하여금 선별하게 하여 기록하게 하신 것으로 봐야합니다(요 15:26).
또한, 복음서에서 동일한 사건들이 서로 겹치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에 대한 이해를 성경권위의 관점에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서로 겹친 것은 어떤 문서를 보고 서로 베낀 결과라고 비판하고, 서로 다르건 각자 자신들의 생각을 주장하기 위해서 쓴 것이라고 비판합니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품을 만한 이러한 의심은 기자들의 지성과 감성과 환경을 주관하시는 원저자이신 성령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라고 생각합니다.
S연구생 저도 이 문제를 성경권위 측면에서 두 가지 점으로 설명할 수 있다고 봅니다. 동일한 사건이 반복되는 것은 예수님께서 구약에서 언약한 메시야로서 분명히 유대 땅에 오셨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분명한 증거들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서로 중첩되지 않는 사건들과 같은 사건에 대한 다른 해석이 등장하는 이유는 원저자이신 하나님이 계시하고자 하는 목적과 의도가 다르다는 것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이라고 봅니다. 그래서 허다한 사건들 중에서 선별하도록 하시고 각각의 다른 해석을 제시하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존재를 입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는 증거라고 봅니다. 더 첨가한다면, 구약에서 분량이 적은 룻기나 소선지서 특히 오바댜, 신약에서는 요한 2서와 3서 그리고 유다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기록된 분량을 가지고 성경권위의 경중(輕重)을 판단하는 오류를 범해서는 안 된다고 봅니다.
4. 바울 서신들 중 문체와 내용에 차이가 있기 때문에 모두가 바울 저작이 아니다?
박홍기 연구원 앞서 여러분들이 제시하신 것에 저도 동의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한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의 탁월함을 다시 확인하게 됩니다. 역사비평가들은 복음서뿐 아니라 바울 서신에 대해서도 상당 부분 위작(僞作)이라고 주장합니다. 로마서, 고린도전후서, 갈라디아서, 빌립보서, 데살로니가전서, 빌레몬서만 바울 서신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주장은 서신서 원저자가 성령 하나님이시라는 전제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울 사도는 어디까지나 성령 하나님이 주관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종으로서 부름 받은 심부름꾼일 뿐입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기자인지 아닌지를 확인한다고 해서 서신서가 진리인지 아닌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들의 서신서 접근 방법 자체가 인간 저자에서 출발하는 문제를 안고 있다는 것입니다.
역사비평가들은 에베소서와 골로새서가 바울의 문체와 다르기 때문에 바울 저작이 아니라고 합니다. 에베소서와 골로새서는 과거의 영적 부활을 주장하는 반면 로마서와 고린도전서는 미래의 육신 부활을 강조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본문 전체의 주제를 보지 못하는 막연한 추측에 의한 평가에 불과합니다. 여기서 말한 ‘전체 주제’라 함은 서신서의 논리적 단계를 중시하면서 나아가 바울의 의도에 초점을 맞추는 것이 아니라 성령 하나님의 기록 목적에 합당한 것을 말합니다. 성경신학에서는 성령 하나님의 기록 목적을 바울 서신의 배열 즉 편집순서를 따라가면서 명확하게 정리하고 있습니다. ‘성경신학총서’를 간단하게 인용하고자 합니다. 바울 서신은 요약하건대 성령께서 부활 승천하신 그분이 바로 구약의 약속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증거하는 내용입니다. 로마서부터 빌레몬서까지 그 배열은 논리적으로 연관되어 있으며 구성 면에서도 논리적 단계로 구조화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인 탁월한 진리입니다. 구성을 보면 로마서와 고린도 전후서 그리고 갈라디아서는 ‘교회의 양육을 통해’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증명합니다. 즉 사도행전은 성령께서 말씀으로 ‘교회의 설립’을 증거하는 내용이며, 이어서 칭의의 복음(로마서)으로 양육하여 단합과 일치(고린도전서)을 이루게 하시고 나아가 화해와 협력(고린도후서)으로 양육하셔서 은혜의 복음(갈라디아서)으로 성령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교회 양육의 내용입니다. 그리고 에베소서부터 빌레몬서는 성령께서 부활승천하신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교회 무장을 통해’ 증명하는 진리입니다. 에베소서는 ‘교회의 진리’가 무엇인지 밝혀서 무장의 토대를 놓고, 빌립보서는 복음에 합당한 생활로, 골로새서는 굳건한 믿음을 구축하게 하시고, 이어서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는 하늘에 속한 성도의 거룩한 생활을 강조하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디모데전서부터 빌레몬서는 교회 진리와 교회 생활로 무장한 교회로 하여금 체계를 갖추게 하신다는 내용입니다. 이른바 목회서신으로 알려진 것은 그 자체로 이해될 수 없습니다. 반드시 에베소서부터 논리적 연관성을 가지고 설명해야 합니다. 이것저것 순서 없이 맘대로 읽어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이러한 바울 서신의 배열에 나타난 중요한 논리적 연관성을 이해하지 못하면 역사비평가들처럼 자의적으로 함부로 바울 저자설을 문제 삼으면서 성경 기록의 원저자가 성령 하나님이심을 부정하고 나아가 성경권위를 훼손하게 됩니다.
역사비평가들은 바울이 데살로니가전서를 기록했다고 하면서 데살로니가후서는 아니라고 합니다. 특히 예수님의 재림과 관련해서 전서는 ‘도적같이’ 온다고 했는데, 후자는 ‘징조’가 있다고 해서 다른 입장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이것도 데살로니가전서와 후서를 성경 전체의 맥락에서 보지 못한 어리석은 판단이라고 봅니다. 데살로니가전서의 재림은 세상이 평안하고 안전하다고 할 때 도적과 같이 갑자기 예수께서 오시는 현장의 상황을 강조한 내용입니다. 그래서 거룩한 성도들이 소망의 인내로 더욱 근신하게 하시겠다는 약속을 강조합니다. 반면 데살로니가후서는 예수께서 도적과 같이 갑자기 재림하시기 때문에 그 상황에서 거룩한 성도들을 어떻게 견디게 할 것인지 그 상세한 방법을 약속으로 알려주는 내용입니다. 즉 적그리스도가 등장할 때 거룩한 성도들이 미혹 당하지 않는 방법을 알려주십니다. 그래서 각각의 목적이 다를 뿐이지 다른 내용이 아닙니다. 따라서 단편적인 차이점으로 바울이 동일한 저자가 아니라는 비판은 일견 합당한 것처럼 보이지만, 전체를 보지 못하고 성령께서 성경의 원저자가 되신다는 것을 보지 못한 수준에서 나온 미숙한 판단입니다. 사실 이러한 문제는 히브리서부터 요한 삼서까지 계속 관련됩니다. 다음 좌담회에서 다루도록 준비하겠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