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비평학(성서고등비평학) 비판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특별기획 심층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성경권위를 훼손하는 역사비평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여 성경신학이 어떻게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교계에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과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객원기자: 오늘은 성경권위에 대한 역사비평학자들의 견해를 논의의 주제로 좌담회를 시작하고자 합니다. 바로 ‘성경의 원전(原典)이 현재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성경무오설은 성립할 수 없다’는 주장입니다. 그리고 원전의 내용을 그대로 기록했다는 사본(寫本)은 하나가 아니라 그 종류는 매우 다양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지금 읽고 있는 성경은 처음부터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문서설자 혹은 역사비평학자들이 현재 신학의 대세를 이루고 있습니다.
P연구생: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그 권위를 지키려는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 연구자들에게 있어서 이 문제는 반드시 해명을 해야 한다고 봅니다. 특히 성경권위에 대해 어떤 비판이나 의심도 없이 당연한 것으로 맹신해 온 전통 신학의 그늘아래 있는 자들에게는 ‘다 아는 비밀’인 것으로 봅니다. 글자 한 자 한 자가 하나님의 감동으로 기록되었다고 주장하는 축자영감설자들이 있습이다. 그리고 성경기자는 단지 하나님께서 불러주는 대로 ‘타자기’역할만 했다는 기계적 영감설을 신봉한 자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감히 ‘성경원전이 없다’는 말을 꺼내기 어려울 것입니다. 사실 약간의 비판 의식만 있어도 기계적 영감설이나 축자영감설을 주장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원로연구원: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말할 때, 혹자들은 ‘문자’ 하나하나에 얽매입니다. 그렇다고 ‘문자’ 하나하나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닙니다. 글자는 문장을 구성하기 위해 필요하며, 그 문장에 나타난 이론이나 사건은 하나님께서 특별히 의도한 바를 전달하기 위한 것입니다. 성경에 기록된 수 천 가지 사건이나 이론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그 의미로 볼 때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확증하기에 충분하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을 연구하여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을 정립하는 과정에서 한글 번역본인 ‘개역성경’을 주로 사용했습니다. 원어 전문가도 아닌 제가 만약 문자나 문장에 얽매인 상태로 ‘말씀’이라는 말을 이해하는 데서 그쳤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것입니다.
J연구생: 역사비평학자들은 하나님께서 최초의 성경 원전을 기록하게 하셨다면 왜 그 것을 제대로 보존하지 않았겠냐고 반문합니다. 그리고 성경은 하나님의 영감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시대마다 기록한 인간의 기록이며 인간이 임의대로 모아서 만든 문서라고 합니다. 그런데 앞서 성경신학을 제창하신 원로께서 말씀하신 대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말에서 ‘말씀’이라는 의미는 문자나 문장으로 표현한 ‘내용에 담긴 의미’를 말합니다. 즉 하나님께서 기록하게 하신 역사적 사건이나 이론의 의미를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이라고 이해해야 한다고 봅니다. 이는 원로께서도 말씀하신 것처럼 오해가 없어야 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낱말 혹은 문장이나 나아가 문법적 구조를 무시해도 된다는 말이 결코 아닙니다. 현재 성경은 ‘사본’ 혹은 ‘역본’밖에 없는 상황에서 성령의 감동에 의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는 것은 성경을 ‘의미 분석’통해 ‘하나님 계시’ 중심으로 접근하도록 인도신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입니다.
원로연구원: 제 자랑이 아닙니다. 오해 없이 들어주시면 좋겠습니다. 지금 성경의 내용에 담긴 의미를 중심으로 해석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개역성경을 통해 자세히 정리해서 수립한 ‘성경신학(The Bible Theology)'은 하나님의 계시 방법을 언약성취섭리사적 관점으로 연구한 결과입니다. 그리고 성경 계시의 목적을 전체 내용의 의미를 파악해 하나님의 존재와 속성을 중심으로 해석한 결과입니다.
여러분들의 의견을 청취하면서 떠오르는 생각이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성경을 보는 성도들이나 나아가 역사비평학자들의 성경독서법이 저 자신과 매우 다르다는 사실을 느꼈습니다. 저는 성경을 우선 거시적으로 봅니다. 다시 말해 어떤 부분을 보더라도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의 전체 내용을 전제하고 해당 부분을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낱말이나 일부 문장 내용에 얽매이지 않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정확히 볼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강론 집 18권을 저술할 때도 성경원어인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전공하지는 않았지만 번역을 바로 잡은 부분이 꽤 많습니다. 물론 앞으로 더 철저하게 검토해야 부분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비평학자들의 시도를 보면서 제가 확인한 것은 그들이 대부분이 미시적으로 보다가 결국 성경의 권위를 부정하게 되는 불행한 결과를 초래한 것으로 보입니다.
S연구생: 지금 말씀하신 것은 이렇게 이해하면 어떨까 합니다. 성경을 하나님에 대한 계시 중심으로 보지 못하면 그야말로 어떤 부분을 자의적으로 해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죠. 그리고 어떤 부분이 다른 부분과 내용이 조금만 차이가 나도 문자주의에 얽매여 성경의 권위를 스스로 부정하게 된다는 것이죠. 원로께서 교회에서 30년 이상 성경을 강론하면서 성경에 대해 왜 ‘알면 다 알고 모르면 다 모른다’고 항상 강조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성경신학은 구약과 신약을 언약과 성취라는 섭리방법에 의해 해석을 합니다. 그런데 현대 신학계에 주류를 이루고 있는 문서설은 성경해석의 근본 원리를 거시적 시각으로 접근하지 목하고 있습니다. 그 결과 축자영감설과 기계적 영감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문자주의에 노예가 되어 스스로 걸려 넘어지는 것으로 보입니다.
원로연구원: 다시 원론으로 돌아가 보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할 때, 말씀이라는 의미는 많은 사건과 이론에 담긴 ‘의미’를 가리킵니다. 그래서 저는 성경전체의 의미 분석을 통해 하나님에 대한 계시 중심의 해석을 시도해서 ‘의미분석 성경개론’(진리의말씀사, 2005)이라는 표제로 책을 저술했습니다. 맞아요. 지금은 사본이나 번역본 밖에 볼 수 없어요. 그런데 만약 지금 원전이 우리 앞에 있다고 합시다. 그 원전으로 수 천 년 전 사건을 지금 이해하는 말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예수님 당시는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야 하고, 모세의 경우는 3천 5백년 전으로 가야합니다. 언어는 역사의 흐름과 함께 그 의미가 많이 변한다는 사실은 아무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원전이 없으므로 사본이나 역본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며 그 뜻을 정확히 알 수 없다는 말은 참으로 어처구니 없다고 봐요. 여기엔 근본적인 문제가 도사리고 있어요. 기록하는 원저자도 하나님이시고 기록하는 시간 조절을 하는 분도 하나님이시고, 기록한 것을 보존하시는 분도 하나님이세요. 그리고 보존하여 전승하는 일이나 번역하는 주관자도 하나님이시며 깨닫게 하는 분도 하나님이세요. 저는 이 고백의 바탕 위에서 60평생 성경을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으로 대하면서 연구했습니다. 손녀들이 캐나다에 살 때 성탄절 카드를 보냈어요. 한 아이는 ‘하라버지’라고 또 다른 아이는 ‘할아버지’라고 써서 보냈어요. 그래도 손녀들의 뜻을 헤아리는 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어요. 하나님 앞에서 성경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성경을 대하는 근본 태도에서 빗나갔기 때문에 지금 문서설과 비평학이 신학교를 지배하고 있다고 봅니다. 우리의 역할이 참으로 큰 시대를 살고 있어요.
P연구생: 현재 우리 손에 있는 ‘개역성경’만으로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어서 무엇보다 감사하다는 감동이 밀려옵니다. 차세대들의 성경연구와 관련된 생각이 듭니다. 성경신학을 통해 성경권위를 지키고자 하는 차세대들에게 지금까지 원로께서 강조하신 것을 적용해 보면, ‘하나님의 계시’와 ‘인간 이성’의 근본 차이를 고민하고 파악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인간의 이성은 근본적으로 인간 중심입니다. 그래서 성경의 내용을 대할 때 신학생이나 학자가 자신의 관점에서 해석하고 결론을 내리는 어리석음을 무엇보다 의식 할 필요가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세계적인 유명세에 빠져서 성경권위를 뒷전으로 밀어버리는 일이 없어야 합니다. 성경신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주어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원리를 지켜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을 접근할 때도 ‘하나님께서 왜 무슨 목적으로 이러한 사건과 이론을 계시하게 하는가’를 항상 의식해야 한다고 봅니다. 충실한 하인이라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듯이 진정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면 성경을 보면서 두 주어(主語)를 결코 쓸 수는 없을 것입니다.
원로연구원: 지금 말씀하신 성경의 모든 사건의 주어를 오직 ‘하나님’으로 항상 시작해서 해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저는 개역성경으로 한국교회 성도들에게 번역되어 보급된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섭리로 봅니다. 어떤 사람이 어떻게 번역하거나 오역하거나 하는 문제는 근본적인 문제가 아닙니다. 어떻게 듣으실 줄 몰라도 저는 성경의 한글번역본 ‘개역성경’만으로도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확증하는 데 결정적인 큰 문제는 없다고 봅니다. 사실 저는 신학적인 고민을 하면서 한국에서 십수 년 동안 신학을 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하나님의 존재 확증과 성경의 절대권위를 확인하기 위해 다녔다고 생각합니다. 저의 신앙 출발은 기독교 장로교의 진보주의 신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십대와 이십 대는 한때 신비주의에 빠져보기도 했고 민중신학에 의해 계몽운동에 몰두하기도 했습니다. 세대주의 신학과 경건주의 신학을 탐독하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칼빈주의 계열의 보수주의 신학을졸업했습니다. 그 결과는 ‘진리의 다른 길은 없다. 성경밖에는 없다.’ 그래서 성경연구를 시작하면서 ‘의미’를 중심으로 성경의 논리적 통일성을 찾기 시작했고 급기야 지난 2014년에 요한계시록까지 강론집 18권에 달하는 총서의 집필을 마쳤습니다.
<다음 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