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담회를 마무리하면서
본 연재는 <한국크리스천신문> 특별기획 심층 좌담회를 지면으로 옮긴 것으로, 성경권위를 훼손하는 역사비평학을 구체적으로 비판하여 성경신학이 어떻
게 대안이 될 수 있는지를 교계에 제시하고자 한다. 이번 좌담회에는 박용기 원로연구원(성경신학학술원, ‘성경신학총서(The Bible Theology Series)’ 저자)
과 박홍기 박사(성경신학학술원 연구원), 성경신학 학술원 연구생 다수와 배윤리(한국크리스천신문 객원기자) 권사가 참여하였다.
1. 초기 기독교 수립은 반유대주의자들의 음모의 결과인가 ?
객원기자 역사비평학자들은 초기 기독교 성립과 성경 확정은 모두 역사 초기부터 특정한 집단들에 의해 일어난 조작의 결과라고 비판합니다. 처음에 기독교는 유대인들을 중심으로 나사렛 예수를 구약의 메시야로 믿었다고 합니다. 그 대표적인 종파가 에세네파라고 하지요. 에세네파는 쿰란 동굴에서 금욕 중심으로 생활하면서 예수가 가르친 율법을 완성하기 위해서 애쓰던 유대인 기독교인들이었습니다. 이 쿰란 공동체는 예수가 모세의 율법을 폐기하러 온 것이 아니라 더욱 철저하게 지키게 하려고 온 자라고 믿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러한 유대인 기독교인들에 맞서서 자신들만의 기독교를 만들어내고자 하는 무리가 있었다고 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뒤늦게 사도가 된 바울이라는 인물이며, 이 사람을 중심으로 유대교 중심의 기독교는 왜곡되었으며 의도적으로 조작되었다고 합니다. 기독교의 성립을 이렇게 보는 역사비평학자들의 주장에 대해 오늘도 날카로운 비판을 통해 좌담회를 마무리해 주시길 바랍니다.
박홍기 연구원 먼저 이 좌담회의 의의가 크다는 말을 하고 싶습니다. 성경권위 위에 세워진 한국의 많은 신학교와 교회들이 성경의 절대권위를 포기하는 상황으로 치닫는 것을 실감하는 와중에도 여호와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동시에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령께서 보존하고 계신다는 것을 먼저 강조하고 싶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문서설과 역사비평학이 제기한 의문들을 성경 본문에 대한 대답부터 기독교 역사 전반에 이르기까지 영존(永存)하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분명한 존재에 근거해서 성경적인 결론을 이끌어냈습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이천 년 기독교 역사를 조작극으로 만들려고 하는 자들입니다. 성경에 대한 바른 연구를 위해 비판적 접근을 운운하지만 따지고 보면 성경의 신적 권위를 해체하려고 합니다.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고 한 뒤에, 그 성경에 근거한 기독교 역사 전체를 조작극으로 몰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은 존재하지 않으며 기독교는 많은 신화(神話) 가운데 하나라고 말하려고 합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초기 기독교에서 가장 심각하게 조작된 것이 바로 ‘고통받는 메시야’라는 이미지라고 말합니다. 원래 유대인들이 보는 구약 성경에는 메시아가 권력과 권세를 가진 왕이었지 힘없이 고통당하는 자가 아니었다고 합니다. 예수를 따르던 제자들을 중심으로 힘없이 십자가에 죽은 예수를 인류의 죄를 구원하기 위해 제물이 되신 구속주로 조작했다고 합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의 이러한 주장은 그야말로 기독교를 신화(神話)로 만들려는 적그리스도 무리의 전형으로 보입니다.
S 연구생 맞습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은 유대인에게 버림당하여 죽은 예수를 추종하던 자들이 이사야 53장과 시편 22편을 나약하고 고통받는 메시야로 확대해석하여 인류의 구원자로 가공해간 역사가 예수 죽음 이후의 기독교 역사라고 합니다. 이렇듯 역사비평학자들의 주장에서는 살아계신 하나님, 성경진리의 절대권위, 지금도 교회의 머리 되신 ‘주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은 전혀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들은 그 시대마다 역사를 섭리하시면서 자신의 존재와 능력을 계시하시는 절대주권자이시며 무한한 은총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정하려는 자들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앞서 여러분이 말씀하신 대로 우리 좌담회가 진리투쟁의 성격을 갖는다는 말에 공감합니다. 왜냐하면 문서설자와 역사비평학자들은 성경권위 부정과 기독교 역사 왜곡 그리고 신에 대한 불가지론 혹은 신의 죽음을 말하려는 자들이며, 그들은 전형적인 적그리스도 무리라고 봅니다. 지금 말한 서너 가지 내용은 모두 연결되는 사항들입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모순 없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지 못하면 결국 기독교도 신화가 될 수밖에 없어요. 역사비평학자들은 이러한 기독교의 약점을 잘 알고 있어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까지 살펴본 대로 우선 그들은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 인간이 수집한 문서들이라고 조작하고 있어요. 그들의 사악한 의도를 보면서 우리 시대에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한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을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셨다는 사실은 정말로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한한 은총이라고 봅니다. 이러한 진리확정 속에서 그 확신으로 죽어도 어떠한 후회와 여한이 없는 진리를 질그릇에 담아 주셨다고 봅니다.
다시 오늘 문제로 돌아와 보면, 고통받는 메시야가 조작극이라는 그들의 주장은 두 가지 사실을 숨기고 있어요. 우선 구약에 대한 무지이며, 그다음은 인간이 겪는 고통의 현장에서 살아계신 하나님에 대해 확신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구약은 처음부터 메시아에 대해 수많은 인물을 통해서 언약하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구약 전체 역사를 통해 하나님이 보내기로 정하신 메시야는 고통과 죽음을 겪는다고 말씀하십니다. “아벨의 피로부터 제단과 성전 사이에서 죽임을 당한 사가랴의 피까지”(눅 11:51) 모두 예수님이 반드시 겪을 고난의 사건에 대한 예언이라고 말씀하셨지요. 문제는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모든 힘든 고난과 처참한 고통의 사건을 어떻게 정확하게 메시야에 대한 언약인지 증명하는 일이겠지요. 저는 이것을 1995년부터 2014년까지 ‘성경강론’으로 모두 확정해 놓았습니다. 언제라도 역사비평학자들과 솔직하게 토론하는 자리가 마련되었으면 좋겠습니다. 하나하나 모두 증명해 주고 싶네요. 예수께서 십자가에 죽으셨기 때문에 그가 바로 구약에서 약속된 메시아가 분명하다고 말이에요.
그리고 인간이 겪는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현장에 하나님이 과연 존재하는 것인가 하는 문제는 앞의 내용과 직결됩니다. 성경을 통해 영원히 살아계신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지 못하면 자신이 겪는 고통 속에서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할 수 없게 됩니다. 역사비평학자들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지 못하는 순간 곧바로 자신의 고통은 이제까지 믿었던 하나님에 대한 부정과 반대의 심리로 바뀔 수밖에 없다고 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과정에는 ‘문자주의’와 ‘기복주의’도 자리 잡고 있다고 봅니다. 성경에 적힌 대로 믿고 잘 따르면 그것을 보시고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복을 주신다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인간의 생활을 행복하게 해주는 비결이 적힌 주술서가 결코 아닙니다. 성경에 대한 역사비평학자들의 악의적 반란을 보면서 한편으로는 측은하고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어요. 성경을 문자주의로 열심히 보았지만 성경에 담긴 여호와 하나님의 존재 확증에 도달하지 못한 것을 보면 말이에요.
2. 복음서들은 반유대주의를 위해 조작된 과정의 산물인가 ?
J 연구생 역사비평학자들에 의하면 기독교 초기 상황에서 유대인 일부도 마태복음을 받아들여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다고 말합니다.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이 율법을 폐하는 게 아니라 완전하게 지키도록 해주기 위해 이 세상에 왔다는 것이지요. 그러나 예수께서 원하는 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고 결국 로마에 의해 죽었으며, 그 이후 고난 받아서 죽은 예수를 예수의 추종자들이 유대인들에 맞서서 조작하기 시작하여, 한참 후에 요한복음을 통해 최종적으로 조작했다고 합니다. 급기야 요한복음에 가면 예수를 죽인 유대인을 ‘마귀의 자식’(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저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니라. 요 8:44)으로 만들어 버렸다고 합니다. 참 그럴듯한 이야기로 조작해 내고 있다고 봅니다. 성경을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처럼 처음부터 끝까지 진리로 확증하지 못하면 역사비평학자들의 주장이 맞는 것처럼 보일 것입니다. 복음서를 역사적으로 조작한 결과물이라고 보는 역사비평학자들은 사도행전부터 요한계시록은 정체불명의 예수 추종자들과 그리고 사도도 아닌 바울이 사도 행세를 하면서 조작한 것들로 보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이 저지른 일은 율법과 복음을 이분화한 것이며, 바울은 유대인들과 비유대인들을 갈라놓은 분리주의자의 원흉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분리주의는 동로마제국의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함으로써 서구 기독교의 조작의 역사는 반유대주의로 완결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중세부터 현대까지 유대인은 기독교인들에 의해 천 년 이상 박해를 받게 되었다는 것이 역사비평학자들의 주장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역사비평학의 왜곡된 시각을 보면서,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지 못하면 어떤 결과를 낳게 되는지 분명하게 알게 되었습니다. 성경 한 절 한 절을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고 있는 ‘성경신학’을 볼 때마다 역사비평학자들의 상황은 살아계신 하나님의 심판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마치 수 천 년을 기다려온 메시아가 눈앞에 나타나서 말씀과 표적으로 자신을 메시아로 확증해 주고 있는데, 이 예수를 죽이고 마는 악의 도구가 된 신세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불쌍하지요. 성경신학을 통해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인하는 진리투쟁이 확산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P 연구생 정말로 불쌍하고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듭니다. 성경을 애초부터 부정하려던 것은 아닌데 성경을 보면 볼수록 진리로 믿어지는 것이 아니라 모순과 인간적인 누군가가 조작한 책으로 볼 수밖에 없다는 것에 안타까움이 큽니다. 동일한 예수님의 사건에 대한 복음서를 성경신학에서 네 가지 주제로 정리한 것은 진리의 확증일 뿐만 아니라 그야말로 예수를 그리스도로 믿는 성도에게는 영적 ‘생명’ 자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봅니다. 정말로 성경신학으로 복음서의 논리적 확정을 하지 못했다면 저 역시도 하나님을 믿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을 직임 즉 선지직, 왕직, 제사직으로 정리하고, 마가복음은 그리스도 확증을 통해 예수님의 신분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낮아지시고 높아지는 신분으로, 그리고 누가복음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천국 사역을 하시는 분으로, 마지막 요한복음은 앞서 증거한 탁월한 말씀 전파와 표적을 통해 예수의 본성이 하나님의 신성임을 확정하고 있다는 것이죠. 정말로 탁월한 논리 중에서도 완벽한 논리적 구조가 복음서라고 봅니다.
3. 성경이 조작된 인간 문서이므로 삼위일체론도 종말론도 조작된 결과물이다 ?
객원기자 역사비평학자들은 유대인 중심의 초기가 아닌 고대 후기 기독교인들이 성경을 조작하여 예수를 하나님으로 만들어버렸다고 합니다. 초기 유대인 중심 기독교는 예수를 신의 아들이 아니라고 보았으며, 죽어서 부활했다는 교리를 날조할 때부터 비로소 예수는 하나님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예수가 하나님이다’란 명제는 기독교의 핵심을 제대로 정의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됩니다. 왜냐하면 복음서를 논리적으로 정확하게 모순 없이 정리했을 때, 성경의 결론인 ‘하나님은 언약대로 성취하시는 여호와이시다’라는 것이 기독교의 핵심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신학(Park's The Bible Theology)은 ‘예수께서 구약의 언약대로 오신 그리스도이시므로, 하나님은 여호와이시다’를 기독교 신앙의 고백으로 정의합니다. 쉬운 명제 같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이유는 이러한 명제는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증하지 못하면 불가능한 명제입니다. 이렇게 성경 전체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함으로써 성경신학은 서구 중심의 전통 기독교가 해결하지 못한 중요한 신학적 문제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가령 삼위일체론이나 종말론 같은 교리들 말입니다.
성경신학학술원 원로 조금 전 어떤 연구생의 말처럼 복음서를 직임과 신분, 사역과 본성으로 정리함으로 전통 기독교 교리의 난제들을 많이 해결하게 되었어요. 복음서에 대한 성경신학적 논리적 통일성의 증명으로 예수의 신성과 인성 문제, 낮아짐과 높아짐, 예수의 신적 사역 즉 천상 사역과 지상 사역의 통일성 등을 해결했다고 봅니다. 나아가 창세기부터 말라기까지 구약 전체도 ‘여호와의 메시야 언약’이라는 ‘의미’를 삼위일체론 관점에서도 해명하고 있다고 봅니다. 그런데 저는 전통 교회의 교리에서 ‘삼위일체’라는 말이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 이해의 장애물로 봅니다. 왜냐하면 영존(永存)하신 하나님에 대해 수(數)를 사용해서 접근한다는 발상 자체가 시작부터 잘못되었다고 봅니다. 창세기 1장 천지창조 사건부터 요한계시록 마지막 장의 새하늘과 새땅의 성취까지 어느 한 부분도 영원하신 하나님의 존재 계시가 아닌 곳이 없습니다. 성경을 그대로 소개하고 따라가면 여호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보혜사 성령에 대한 균형적인 신앙을 얼마든지 갖게 됩니다. 성경을 무시하고 철학적으로 ‘셋’과 ‘하나’를 인위적으로 결합하려고 하는 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무엇보다 먼저 성경에 대한 무지를 통탄하고, 성경을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는 일이 우선인데 신학자들은 그런 문제가 신학의 핵심이라고 하니 안타까울 뿐입니다.
길게는 말씀드리지 못하지만, 삼위일체 교리의 문제들, 가령 에비온파, 마르키온, 영지주의, 양태론, 종속설, 성부수난설, 사벨리우스주의 등 모두가 성경에 대한 무지 또는 단편적 이해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이라고 봅니다.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25년 니케아 공의회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교리가 맞다고 손 들어준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닙니다. 그 역사적 사건도 교리사적 성경주석적 관점에서 엄밀하게 평가하면, 성경을 통해서만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존재가 확증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사건이라고 봅니다. 다음에 기회가 되면 삼위일체론의 문제점을 더 다루면서 성경신학의 중요성을 토론할 수 있길 바랍니다.
그리고 역사비평학자들은 종말론도 조작된 것이라고 합니다. 가령 복음서에 보면 예수는 자신을 종말론적 인물로 말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이 세상과 저 세상, 천국과 지옥의 구조가 아니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다만 너무도 힘든 현실의 삶을 잘 견디면 장차 신의 최종 심판 때에 모든 것을 심판하실 것이므로 인내하도록 하기 위한 것이 예수님의 종말론이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의 말처럼 그 심판 날이 예수 생전에 오지 않았고 자신도 결국 로마 제국에 의해 죽어버렸다는 것이죠. 이렇게 예수가 먼저 죽자 예수의 추종자들이 예수의 본래 종말론을 조작했다고 합니다. ‘하루가 천년 같고, 천년이 하루 같다’는 말로 조작했다고 하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잘 믿어야 다음 세상에서 ‘복’을 받는다는 인과응보 사상을 날조했다고 합니다.
참으로 어리석은 역사비평가들의 조작이라고 봅니다. 예수님의 종말론은 창세전부터 심판 후까지 모든 피조 세계를 아버지 하나님과 맺으신 영원한 언약에 따라 자신이 주권적으로 통치하고 있다는 것이 핵심입니다. 가령 자신의 죽음도 힘이 없어서 유대의 종교자들과 로마 제국에 당했던 것이 아니라 이미 창세전에 확정하신 언약이 성취되는 것으로 여호와 하나님은 어느 순간에도 존재하지 않는 순간이 없다는 것이 종말론의 핵심입니다. 성경을 창세전 ‘영원한 언약성취’에 근거한 여호와 하나님의 계시 기록으로 완벽하게 설명하지 못하면, 역사비평학자들이 제기하는 물음에 전통 교회의 종말론도 결코 답할 수 없다고 봅니다. 성경신학에서 종말은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언약하신 대로 반드시 성취하시는 것에 대한 확증입니다. 요한계시록 22장에 가서 비로소 새 하늘과 새 땅이 오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창세전에 언약하신 대로 성취될 뿐입니다. 마찬가지로 성도들이 이 세상에서 뭔가 선한 공로가 있어야 하늘나라에 비로소 들어가는 것이 결코 아닙니다.
성경의 통일성을 찾지 못한 역사비평학자들은 종말론을 인간의 인위적 조작극으로 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리고 전통 신학의 종말론은 성경 전체를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절대진리로 확정하지 못했기 때문에 인과응보와 기복주의로 전락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와 무한하신 은총으로 성경신학을 통해 성경의 통일성을 찾게 하셨습니다. 따라서 성경 어느 곳을 보더라도 영존하시는 하나님의 존재를 확증하고 오직 그만 경외하고 찬양하게 되는 것이라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