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열셋. 로마노프 왕조의 완정과‘제3 로마제국’의 연장
41 왕께서 그 발과 발가락이 얼마는 토기장이의 진흙이요 얼마는 철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나누일 것이며 왕께서 철과 진흙이 섞인 것을 보셨은즉 그 나라가 철의 든든함이 있을 것이나 42 그 발가락이 얼마는 철이요 얼마는 진흙인즉 그 나라가 얼마는 든든하고 얼마는 부숴질 만할 것이며(단 2:41~42).
4. 여제(女帝) ‘예카테리나’: 근대 러시아 정착의 요인(要人)
인용한 성경의 다니엘 예언은 야벳 족속의 상징인 로마제국에 대한 예언이다. 복잡한 인종으로 만들어진 네 번째 제국인 로마는 오래된 역사를 지나고 연명할 것을 예언하고 있다. 로마제국은 먼저 서쪽에서 시작했다가 망했으며 하지만 천 년 동안 동쪽에 자리 잡으면서 종교개혁 직전까지 이어졌다. 그리고 종교개혁 무렵에는 동북쪽 러시아 공국을 중심으로 현재까지 이어지는 야벳 문화와 그 정치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동양으로 넘어오는 성경 진리의 대이동 속에 이 러시아 역사가 차지하는 부분은 중요한 의미를 많이 가지고 있다. 현대의 러시아 혁명과 공산주의를 이끈 본영(本營) 러시아, 일제 강점기에 이주한 우리 동포들이 거주하는 땅, 그리고 성경진리를 토대로 주의 몸 된 교회를 세우고 있는 고려인 교회들 등 그 의미를 짚어야할 부분이 많이 있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의미를 차후에 더 밝히고자 한다. 우선 현재 ‘제3 로마 제국’의 흉내를 내고자 했던 17~18세기부터 그 배경사를 잠시 짚어보려는 것이다.
로마제국의 부활을 꿈꾸었던 황제(차르) 표트르 1세(Pyotr Alexeyevich Romanov, 1672~1725) 이후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주인은 왕비 예카테리나가 되었다. 창세기 9장 27절에 예언한 ‘창대할 야벳 족속의 동쪽 경계’는 모스크바에서 상트페테르부르그로 오면서 다시 서쪽 로마제국까지 넘보는 기회가 마련된다. 이 상황에서 예카테리나는 알렉세이의 아들 표트르 2세를 황제로 세우려는 보수적인 귀족들을 제압하고 여제(女帝)에 등극한다. 권력의 제2인자 알렉산드르 멘쉬코프와 친위대를 움직여 상트페테르부르그의 실권을 장악한다.
예카테리나는 표트르의 정치 개혁을 치밀하고도 지속적으로 밀어붙인다. 결과는 매우 좋았다. 러시아 사람들은 여제에게 호의적이었다. 급진적이며 강압적이었던 남편 표트르와는 달리 여성으로서 그의 부드럽고 온화한 모습을 매우 잘 활용하면서 백성의 환심을 얻었다. 이전 황제에 비해 상대적으로 개혁에 대한 반발이나 부작용이 줄었다. 정치적 대적자들이던 보수적인 귀족들을 여제는 직접 부딪히지 않고 효과적인 우회로를 이용해서 달래며 설득했다. 그리고 여제 예카테리나는 러시아 남성들의 마음을 얻기 위해 여성의 재능을 움직이는 전략을 사용했다. 그녀는 왕실 여성들만 입단 가능한 ‘성 캐서린 기사단(Order of St. Catherine)’의 문을 귀족 여성들에게도 개방했다. 그리스 순교자 캐서린이 수호성인인 이 기사단을 균형 있게 구성했다. 왕실의 여인들 그룹과 12명의 대회원(Grand Cross) 그리고 96명의 소회원(Small Cross)로 정비했다. 이 조직의 견고함은 로마노프 왕조가 공산혁명으로 종말을 고할 때까지 이어진다. 여제 예카테리나는 왕실의 견고함을 귀족들이 후원하는 방식으로 정비했다. 남편보다 정치적 적대 세력을 치밀하게 길들이는 데 있어서 더 나았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런데 예카테리나는 지적 능력 면에서 취약함이 있었다. 러시아 어를 능숙하게 읽고 쓰는 데 부족했다. 하지만 현명한 판단과 공정한 처세로 자신의 약점을 극복했으며 다양한 세력의 귀족들에게 각각 권력을 분할하여 점유하게 함으로써 결국 귀족 모두 왕실을 위해 충성하는 결과를 낳게 했다. 긴 전쟁과 강압적인 통치에 지쳐있던 러시아인들은 서서히 번영의 맛을 보기 시작했다. 옛 로마제국의 번영 회복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개혁의 성과는 군사, 종교, 지방 정부에 이르기까지 큰 무리 없이 진행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건축도 계속 이어져 20년 동안 표트르가 온갖 정성을 쏟았고 ‘러시아의 베르사유’라는 불리며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페테르고프 궁전도 마쳤다. 여제는 또한 상트페테르부르크 시가지의 운하를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설했으며, 남편한테 결혼 선물로 받았던 곳에 조그마한 교회와 별장을 짓고 현재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황제의 마을(차르스코예 셀로)’을 단장했다. 이 별장은 그 후 그의 딸 옐리자베타가 별장 자리에 거대한 별궁 ‘예카테리나 궁전(Catherine Palace)’을 증축했고 예카테리나 2세가 다시 다섯 개 돔의 성당과 그 유명한 ‘카메론 회랑’을 추가로 건축한다. 현재 세계적 권위를 내세우는 ‘러시아 과학원(Russian Academy of Sciences)’도 여제의 명령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표트르가 죽은 지 2년 후인 1727년 5월 병에 걸렸으며 후계자를 정할 시간도 없이 갑자기 사망했다. 비천한 출신으로 여제에 올랐던 그는 남편 표트르의 중요한 과업을 죽을 때까지 완수하면서 표트르 명성을 러시아 근대사에서 확고하게 자리 잡게 하는 결정적 공로자였다. 지금도 러시아의 존재감을 세계인들이 느끼게 하는 그 한가운데는 이 여제의 상당한 몫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제3 로마제국’를 표방한 로마노프 왕조의 기틀 마련이 앞으로 이어지는 러시아의 세계적 영향력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다. 노아에게 약속한 야벳 족속의 창대한 문화는 동방의 셈족과 또한 깊게 연관되어 있다. 한국의 기독교 교회사에서 러시아에 대한 역사적 평가는 흥미롭고도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이러한 과정을 더욱 살펴보면서 우리는 16세기에 부활한 ‘성경권위’와 (‘서양의 지혜’가 아닌) 성경적 ‘참지혜’가 이 땅 한국 교회에 어떻게 정착되었고 완결되어갔는지 살펴보려는 것이다.
<166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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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관중과 예 |
통렬한 꾸짖음이자 당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