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8-12-04 19:47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종교개혁’: 부(富)를 탐내는 자들의 비열한 싸움!

종교개혁 : 비열한 본능의 가장 허위적인 분출 중 하나


강하고 억제하기 어려우며 철저하게 비열한 본능 몇 개가 밖으로 나오려 한다 : 오로지 구실만이 필요한데, 특히 이 거친 동물들을 밖으로 내보낼 수 있는 거창한 말을 꾸며낼 구실이 필요하다.
루터 심리학의 유형 : “복음의 자유”를 들어, 축적된 난폭한 요구를 모두 분출하는 거친 가짜 농부. 감각이 만족을 찾으려 한다는 점을 고려해, 다시 주인이 되려 하고, 강탈하고 쓰러뜨리고 저주하려 한다. 특히 교회의 엄청난 부를 탐내면서 쳐다본다.

때때로 신이거나 적어도 그의 대리인인 사제
금욕적 습관이나 훈련 자체는 아직 자연에 반하는 태도와 실존에 적극적인 태도를 드러내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변질과 질병을 말해주지도 않는다.
가혹하고 무서운 발명품을 수단으로 한 자기 극복 : 자신에 대한 외경심을 가질 수 있고 또 요구할 수 있고 또 요구할 수 있게 해주는 수단 : 권력의 수단인 금욕의 가르침
초인적 권력 감정의 대리인이며, 스스로 신의 훌륭한 배우로서 신을 연기하는 것이 직업인 사제는 본능적으로 두려움을 줄 수 있는 수단을 취하려 할 것이다.

인식, 예지, 해를 끼치거나 득이 될 수 있는 능력에 있어, 또 초인적 무아경과 행위의 방식에 있어 초인적 힘의 대리인으로서의 사제 (Friedrich  Nietzsche, 『유고(1885년 가을~1887년 가을)』, 니체전집19(KGW VIII 1), 이진우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7(5), 333~4쪽)


이는 서양철학자 니체가 유럽에서 일어났던 16세기 종교개혁에 대해 3세기 반이 훨씬 지나가고 있을 19세기 말에 내렸던 역사적 규정이다. 니체는 종교개혁 사건을 인간적 본능의 분출로 접근한다. 그것도 천박하고 졸렬하기 짝이 없는 짓으로 말이다. 그리고 조작의 정도가 가장 심한 의도적으로 꾸며진 사건이 종교개혁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종교개혁 이후 독일 사회는 자국 내의 폭동과 주위 나라와 벌인 전쟁의 연속이었다. 진리 싸움은 명분이고 그 밑바닥에는 생존을 위한 먹거리를 놓고 주지 않으려는 자와 빼앗으려는 자가 잔인하게 싸웠던 역사가 전개되었다.
니체는 이 잔혹한 폭동과 살상과 파괴의 전쟁에서 인간의 무자비하고 비열한 욕구를 그럴듯하게 포장해야 하는 구실을 만든 사제(司祭)가 바로 마틴 루터였다고 본다. 루터가 내세운 ‘복음의 자유’의 본질은 난폭한 자신의 욕구를 위장하기 위한 조작된 구호였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성경을 번역한 루터의 의도는 독일 민중들에게 농민전쟁의 구실을 만들어 압제당한 자들과 함께 혁명을 완수하여 지배자의 자리를 독차지하려는 데 있었다. 중세 교회가 천 년 동안 쌓아놓은 온갖 부를 탈취하기 위해서 말이다.

당시 유럽 교회가 쌓아 놓은 엄청난 부는 천국으로 가기 위해서 하나님이 받은 제물이 아니라 교황과 주교와 사제들이 농간을 부려 무지하고 가난했던 백성들한테 빼앗은 그들의 고혈(膏血)이었다는 사실이 폭로되었다. 이것이 독일에서 촉발시킨 종교개혁이며 이 운동에 바로 루터가 앞장섰다. 그의 신학 이론은 모두 이러한 교회 재산을 탈취하기 위한 구실에 불과했다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니체가 볼 때 루터는 중세의 사제들이 대행했던 하나님의 역할 내지 하나님의 대리자 역할을 승계한 것일 뿐이다. 루터가 주장한 사제만 아니라 누구나 신이 될 수 있다는 ‘만인제사장’의 교리는 누구나 하나님의 대리인이 될 수 있다는 그야말로 무지몽매한 민중들에게는 환희의 복음이었다. 약탈을 위한 폭력을 정당화하고 가톨릭 교회의 재산을 마음대로 약탈하고 자신의 비열한 욕망을 억제하려는 세력에 대해 앙갚음하는 데, ‘누구나 신의 제사장 내지 대리자가 될 수 있다’는 선언이야말로 얼마나 기가 막힌 논리이며 정당화하기 좋은 구실이었겠는가?

그리고 마음대로 약탈한 후 배부름이 뒤따를 때 다시 중세의 사제들이 했던 대로 거룩한 종교인의 행세를 해야 했다. 비열한 본능을 감추어야 하기 때문이다. 짐승보다 못한 살상과 약탈을 일삼은 후에 스스로 가혹하고 무서운 자기 관리의 시스템을 만들어 낸다. 그것이 바로 자신을 신격화하는 금욕주의(禁慾主義)다. 잔인한 만행을 마음껏 저지르고 손에 아직 피가 마르지도 않았는데 자기 몸에 다시 생채기를 내면서 성자(聖者)인 듯 자신을 신격화한다. 신의 대리자 혹은 신의 훌륭한 배우 노릇을 하는 이 금욕주의 성직자 앞에 모든 사람들이 또다시 속는다. 세대가 흐르고 신의 이름을 빙자한 만행이 잊혀질 무렵 금욕주의자들은 눈에 보이는 신이 된다. 탈취물은 이미 확보했고 금욕주의적 행위로 성자(聖者) 대우를 받으면서 부정축재는 점점 더 늘어난다. 성인(聖人) 행세는 대중들에게는 신을 대신하여 받는 경배를 가능케 하는 효과가 있으며 동시에 종교인은 무식대중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주입해 신 앞에서 두려움을 안겨주는 배우 노릇을 가능케 한다. 그야말로 금욕주의 종교인은 완벽하게 대중을 속일 수 있는 신과 같은 초인(超人)의 힘을 얻게 된다. 구원자 행세를 하면서 초인적인 힘을 가지고 있는 듯 가장 세속적인 비열한 모습을 숨기며 무지한 대중을 ‘천국’으로 이끈다는 가장 허황된 거짓을 날조한다. 이러한 역사적이며 심리적인 과정이 니체가 보는 16세기 종교개혁 이후의 유럽 기독교 역사다.

니체의 진단과 평가가 모두 맞다고 할 수는 없다. 하지만 그가 지적한 종교인들의 욕심에 대한 심리적 분석은 일면 수긍하게 하는 부분이 있다. 종교인 행세에 숨겨진 너무나 비열한 욕망이 얼마나 치 떨리는 일인지, 이 부분은 오늘 우리 한국 교회의 현장에서도 하루가 멀다고 일어나는 일이다. 니체의 말이 맞기 때문이 아니라, 보혜사 성령에 의한 성경진리의 안내를 받지 않으면 기독교인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참담한 결과를 낳을 수밖에 없는지, 진리의 대안 없이 정신이상자가 되어 가는 니체의 고민과 비판을 통해 다시 한 번 복음진리의 간절함을 바라본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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