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어진 이를 좋아하고 어질지 못한 이는 미워하자
子曰 我未見好仁者 惡不仁者, 好仁者 無以尙之 惡不仁者 其爲仁矣 不使不仁者 加乎其身.
자왈 아미견호인자 오불인자 호인자 무이상지 오불인자 기위인의 불사불인자 가호기신.
有能一日 用其力於仁矣乎 我未見力不足者 蓋有之矣 我未之見也.
유능일일 용기력어인의호 아미견력부족자 개유지의 아미지견야.
논어 4장 「里仁」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내가 아직까지 인(어짊)을 좋아하고 불인(어질지 못함)을 싫어하는 자를 보지 못했다. 인을 좋아한다면 그 이상 더 할 수 없다. 불선함을 싫어하는 자는 그가 선을 행할 때에 선하지 못한 것으로 그 자신에게 행해지게 하지 않는 것이다. ‘하루라도 자신의 힘을 어질게 행하는 데 쓴 사람이 있는가? 어질게 행할 힘이 모자라는 자를 나는 보지 못했다. 아마도 (그런 사람이) 있겠지만 나는 아직 (그를) 보지 못했다.”
공자가 말하는 인을 좋아하는 사람은 그 스스로 인이 좋아할 만한 것임을 정말로 아는 자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세상의 어떤 것도 그를 더 좋게 할 수 없다. 불인한 것을 싫어하거나 미워하는 사람은 불인을 미워해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미워한다. 그러기에 이 사람은 불선을 아예 잘라내어 없애버림으로써 조그마한 불선조차 자신에게 미치지 못하게 만든다. 인(어진 것)을 좋아하고 동시에 불인(어질지 못한 것)을 미워하는 사람을 보기는 어렵다. 하지만 누구라도 혹 하루아침에라도 분발해서 인을 행하는 데 힘을 쓴다면 그 힘이 부족할 사람은 없다. 인을 행하느냐 행하지 않느냐는 오직 자신에게 달려있다. 자신이 하고자 하면 그 자체로 (인이) 된다. 뜻이 지극한 곳으로 기운이 이르기 마련이다. 인을 능숙히 행하기는 진실로 어렵지만 이렇게 자신이 인을 행하고자 하고 그 기운이 이르게 되기에 오히려 쉬울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인을 행할 수 있는데도 행하지 못하는 이유는 사람의 기질이 서로 같지 않아서다. 특히 미혹되고 유약한 사람은 실제로는 인을 행할 능력을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의 실천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공자는 이러한 인간의 모습을 탄식하는 형식으로 인을 좋아할 것과 불인을 미워할 것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의 핵심은 역설적으로 사람이 인을 행하고자 하면 누구라도 그것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드러내는 데 있다. 사람의 기질은 다르다 하더라도 인을 행할 수 있는 힘은 누구나 가지고 있다는 것이 공자의 입장이다. 혹 인을 행한 사람이 있을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태껏 그런 사람을 보지 못했다는 것이 공자의 고백이다. 이러한 탄식을 통해서 공자는 세상 사람들이 인을 좋아하고 불인을 미워해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스도교의 교리와 관련하면 인은 선과 비유될 수 있다. 선의 본체는 하나님이시다. 불선은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것이다. 성경이나 장로교 교리의 관점에서 보면 사람이 선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는 것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에 의해서만 가능하다. 동시에 인간은 스스로 선을 행하여 구원을 얻어낼 수 없다(로마서 3:10).
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그분의 자녀로 선택되었음을 믿기만 하면 모든 사태는 완전히 바뀐다. 그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이자 그리스도와 함께 상속자가 되어 축복의 존재가 된다. 그런 사람을 크리스천 또는 그리스도인이라 한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와 같은 종류 또는 닮은 자들이다. 성경에서 증언하는 그리스도인, 하나님의 택한 자로서의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가 지닌 하늘의 권세를 상속으로 받을 존재다(마 28:18).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선을 좋아하고 불선을 미워할 줄 알아야 한다. 참 그리스도인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나라 일체를 좋아해야 한다. 하나님과 하나님 나라 이외의 일체 곧 불선한 것은 싫어하거나 미워해야 한다. 이 일을 할 수 있는 힘이 없는 사람은 없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할 수 있는 힘을 모두에게 주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힘이 없어서’ ‘돈이 없어서’ ‘시간이 없어서’ 등으로 핑계해서는 안 된다.
대한의 그리스도인들이여! 삶의 현장에서 선하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은 좋아하고 하나님과 하나님의 일들 이외의 것들은 미워하는 신앙생활을 펼쳐나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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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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