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의리와 이익, 어디서 깨우쳐야 할까
의리와 이익,
어디서 깨우쳐야 할까
子曰 君子喩於義 小人喩於利
자왈 군자유어의 소인유어이.
子曰 見賢思齊焉 見不賢而乃自省也
자왈 견현사제언 견불현이내자성야.
『논어』 「위인」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군자는 의리에서 깨우치고 소인은 이익을 얻는 데서 깨우친다.”
공가가 말했다. “현명한 군자를 보면 (자신을) 가지런히(나란히) 할 것을 생각하고 현명치 못한 이를 보면 곧 자신(이 그러한 지)를 살펴야 한다.”
의(義)는 하늘 이치의 마땅한 것(天理之所宜)이다. 이(利)는 인간의 정으로 욕심내는 것(人情之所欲)이다. 정자(程子)는 군자가 의리에 대하여 민감한 것처럼 소인은 이익에 대하여 민감하다고 하였다. 군자는 의리에서 깊은 깨달음을 얻고, 소인은 이익이 있는 것에 밝은 이치를 터득한다는 것이다.
사람에게 생명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고, 죽음보다 더 꺼리는 것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자는 목숨을 잃더라도 의를 택하는 대의의 깨달음을 지녀야 하고 동시에 의를 버리고 이익을 얻는 것은 진정한 이익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러한 깨달음이 있을 때에 군자가 죽음을 마주하고도 의를 세워갈 수 있다.
본문에서 말하는 현명한 자 곧 군자는 이렇게 생명을 버리더라도 의리를 세우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을 마주하는 자는 저 군자의 삶을 본받아서 자기 삶의 자세를 반듯하게 하려고 해야 한다. 단순히 군자와 나란히 하려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사색이나 생활태도 전반에서 군자와 두루 가지런히 같아지려고 해야 한다. 만일에 이익에만 목적을 두고 살아가는 사람을 만나게 되면 그 사람은 이익을 좇는 사람의 모습에서 마음속으로 자신도 이익을 좇아 살아가는 자가 아닌지 돌이켜보아야 한다. 자신이 눈앞의 이익을 좇는 사람마냥 그렇게 의리를 죽이고 구차한 이익을 얻으려고 비열한 인생을 살아가고 있지 않은지를 살펴야 하는 것이다.
깨우침이란 단순히 머리로 암기하는 것이나 많은 지식을 쌓아가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본문의 깨우침(喩)은 어두움을 뚫고 밝아오는 새벽의 밝아짐을 뜻하는 ‘효’(曉)와 같은 깨달음이다. 즉 희미하고 어렴풋이 알던 수준에서 광명한 세계로 관통하는 깨달음으로 변하는 것이다. 이러한 깨달음이기에 그것은 그것을 터득한 자의 인생길을 결정하는 분기점이 되기에 충분하다.
오늘날 자본주의 시대는 모든 인생들에게 작은 이익들을 좇아 살아갈 것을 강요한다. 자본주의 사회는 이렇게 이익을 따라 살아가는 사람들을 정당화시켜 주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분야에서 세계화가 진행될수록 전 세계인들은 더욱 이익을 좇아 살아가는 데 익숙해질 것이다. 현대적인 의미에서 보면 공자는 이러한 세계에서 벗어나서 모든 사람이 인생으로서 마땅히 걸어가야 할 길과 자연만물의 본연을 따르는 길에서 깨우침을 얻기를 강조하였다고 볼 수 있다.
선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의의 길은 무엇이고 이익을 좇아 살아가는 길은 무엇이겠는가. 성경이 그 길을 안내한다. 성경은 구체적 행동으로 드러내어 악행을 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악이나 음란을 생각만 해도 죄라고 판정한다. 성경은 우리에게 의의 좁은 문으로 들어가야 한다고 명하고 있다. 죽고자 하는 자는 살고 살고자 하는 자는 죽는다고 했다. 그렇게 성경을 따라 살고자 하는 것이 대의의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세상에 맞추어 살기 위해 세상의 방법을 따르는 것, 넓은 길을 따라 사는 것, 오직 자신의 평안만을 좇아 사는 것은 이익에서 깨달음을 얻는 것이다.
어느 편의 인생살이든 살아 있는 동안에는 모두 비슷해 보이는 인생길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을 믿는 참 그리스도인이라면 이 두 인생길은 마침내 전혀 다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을 명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성경을 통해 바른 깨달음을 얻어 살아가자. 그런 사람들을 만나서 본받아 실천하는 삶을 살아가 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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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스물. 존 칼빈을 주관하신 하나님 지혜(소피아) <2> |
〈4〉서구 이원론 사상의 뿌리: 로마 가톨릭의 자기중심적 세계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