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의리를 따르는 학자가 되라
子謂子夏曰女爲君子儒 無爲小人儒
자위자하왈여위군자유 무위소인유
논어 제6장 옹야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자하에게 말했다. “너는 의리를 따르는 학자가 되고 사사로운 이익을 좇는 학자가 되지 말라”
스승 공자가 제자인 자하에게 말한 내용이다. ‘유(儒)’는 학자를 가리킨다(學者之稱). 우리나라에서는 선비를 의미하기도 하였다. ‘여’는 ‘너’를 낮추어 부르는 말이다. ‘군자유’는 군자다운 학자를 가리킨다. ‘소인유’는 개인의 이익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한 학자다.
군자유와 소인유는 의(義)를 중시하느냐 아니면 사사로운 이익(利)을 중시하느냐에 의해 나누어진다. 의는 천리를 따르는 것이다. 따라서 군자유는 배움의 길에서 늘 천리의 바름을 최우선으로 익히고 실천하고자 한다. 반면에 소인유는 이(利)를 따른다. 소인유는 천리보다는 재화나 재물의 증식이 따르는 측면의 공부를 중시한다. 그래서 그에게는 조금이라도 자신에게 유리한 공부나 기회가 있다면 사사로움을 선택하고 공공의 이익을 포기한다. 소인유에게는 천리와 같은 공공의 바름을 지키느라 자신의 것을 손해되게 하는 것은 결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당장 개인적으로 이득이 되지 않으면 그런 분야의 공부는 하려고 하지 않는다.
공자가 자하에게 굳이 의리를 좇아 공부하는 사람이 될지언정 이익을 추구하는 공부를 해서는 안 된다고 한 데는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이에 대해 사씨(謝氏, 논어의 주에 자주 등장하는 인물)는 자하가 문학에서는 뛰어났지만 원대함에서는 혹 보지 못했기 때문에 그랬을 것으로 추측하였다(意其遠者大者或昧焉, 의기원자대자혹매언). 자하는 공자 제자의 십철(十哲) 중의 한 사람이며 특히 문학의 방면에서 뛰어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의리의 원대함을 좇는 학문이나 생활면에서는 부족했던 것으로 보인다.
군자유와 소인유는 그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 특히 목사들에게 그대로 적용될 수 있다. 하늘의 진리를 지키는 목사와 세상의 이익을 추구하는 목사로 대칭되는 것이다. 동시에 하늘의 진리를 좇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 현세의 이익을 추구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이다. 또한 개인적으로는 지극히 멀고 지극히 큰 진리의 세계 안에서 살 것인가 그래서 자신의 가치를 원대하게 할 것인가 아니면 눈앞의 이익을 찾아서 단세포적 삶을 살 것인가 일 것이다.
오늘날의 그리스도인들의 실상을 바라보노라면 바울 사도의 신앙의 위대함이 저절로 높이 솟아오른다. 그는 세상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겼다. 그는 자신이 그리스도를 알고 나서 기타의 모든 것을 버렸다. 그는 날마다 죽어갔다. 그는 하늘의 진리를 좇아 산 사람이었다.
예수님은 대한의 그리스도인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신다.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눅 9:24) 그분은 또한 우리에게 자신을 부인하고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요구하신다.
참 그리스도인이여! 자신에게 묻고 대답하자. “나는 하늘의 뜻에 순종하기 위해 나를 죽일 수 있는가?” 또 이렇게 묻고 대답하자. “오늘 하루의 삶 속에서 하늘의 뜻을 따른 것은 몇 번이고 사사로운 나의 이익을 좇은 것은 몇 번이었나?” 대한의 그리스도인이여, 이 대답에서 우리 자신을 더 이상 위선되게 하지 말자.
그리고 딛고 일어서자. 하늘의 진리를 좇아 살아서 우리의 육체와 정욕을 죽이는 고통 속에서 바울 사도가 향했던 그 푯대를 향해 조용히 건실하게 행진해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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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반기독교적 유물론의 원조들: 레우키포스와 데모크리토스 |
서른일곱. 19세기 이후 유럽: 성경권위 추락과 무신론 확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