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마음과 외모를 잘 조화해야 군자
子曰質勝文則野 文勝質則史 文質彬彬然後君子
자왈질승문즉야 문승질즉사 문질빈빈연후군자
『논어』 「옹야」장의 계속이다. 그 해석은 다음과 같다.
“공자가 말했다. ‘자질(본바탕)이 문채(꾸밈)를 이기면 천박해지고, 문채가 자질을 이기면 지나친 겉치레(꾸밈)가 된다. 문채와 바탕이 빛나도록 갖춘 이후에야 군자라 할 수 있다.’”
‘질(質)’은 사람이 태어날 때 받은 본 자질이다. ‘문(文)’은 문채 또는 꾸밈을 말한다. 사람이 본래의 자질만을 믿고서 배움의 과정에서 익히는 다양한 지식들로 그 자질을 조화시키지 않고서 단지 본성만을 내세우는 한 그런 사람은 좀 거칠고 단순한 사람이 되기 쉽다. 언제나 어린아이와 같은 상태로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와는 반대로 자신의 자질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학식이나 가문 등의 외적 조건으로 꾸미려 하게 되면 그의 자질은 결여된 채 자신을 꾸미려고만 하는 사람이 되기 쉽다.
본래 ‘사(史)’는 문서를 관장하는 관리로서 많은 일들에 대해 듣고 경험해서 많은 것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다 보니 정세나 권력에 따라 겉치레로 역사(이야기)를 꾸며내는 데 능숙하였다. 이것이 사가 꾸미기를 잘하는 사람으로 이해되는 이유이다. ‘빈빈’은 ‘반반(班班)’과 같은 의미다. 따라서 ‘문질빈빈’은 사람이 자신의 자질과 꾸밈을 각각 절반씩으로 잘 조화시켜야 함을 말한다. 공자는 군자란 반드시 자신의 자질과 인생의 과정에서 얻은 것들을 서로 반씩 조화하여 자질과 문채를 함께 이루어간 후에야 될 수 있는 인물이라고 보았던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 바탕이나 자질은 주로 마음을 가리킨다. 꾸밈은 사람의 외모 또는 겉모습과 관련된다. 공자의 유학이나 성리학에서 배움의 근본적인 목적은 언제나 마음을 바르게 하는 것이었다. 공자에게서 마음은 인을 근본으로 하였고, 성리학에서의 마음은 사단(인의예지)이 근본이었다. 이런 의미에서 보면 바탕이 꾸밈을 넘어선다는 것은 자신의 마음가짐이 인이나 사단의 마음에 수준에 못 미치는 데도 자기 마음에 따라서 주변을 판단하고 장식해 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런 식으로는 군자다워질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해진다. 반대로 겉으로는 사리를 따르고 조화를 이루는 것처럼 하더라도 마음가짐이 쉽사리 변덕을 부리거나 평안하게 유지되지 않으면 이 역시 군자다운 삶을 살기는 곤란하다. 그래서 공자는 제자들에게 바탕인 마음과 문채인 외모와 인품을 함께 조화시켜 갈 것을 교훈한 것이다.
문질빈빈의 의미는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적지 않은 교훈을 준다고 본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으로 하여금 매사에 본질이나 바탕이 무엇인지를 되돌아보게 할 수 있게 한다.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다 보면 본질과 하찮은 일을 혼동하는 경우가 많다. 오늘날의 사회가 돈이 중심이 되고 인간적 욕망과 열정을 불태우고자 하는 광란의 문화생활을 지향한다. 이 속에서 그리스도인이 살아가다 보면 혼란에 빠져서 당면하고 있는 사태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이럴 때 문질빈빈은 자기 자신에게 무엇이 바탕이고 무엇이 꾸밈인지를 빨리 구별해 보게 할 수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영혼과 영혼의 가치를 바탕으로 삼고 이 토대 위에서 꾸밈을 이루어가야 한다. 그리스도인은 영혼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 성령이 그(녀)를 향해 외치시는 “경성하라, “조심하라”, “새롭게 되라” 등의 깨우침을 빨리 알아차려야 한다. 선한 그리스도인이라면 사회가 더 빠른 변화를 보이고 일류가 되기 위해 바삐 달음질치고 있는 와중에도 눈을 부릅뜨고 마음과 영혼의 순전함을 제일의 가치로 삼을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선한 그리스도인이여! 이 마음을 오늘의 삶 속에 적용하고 이 삶을 통해 배운 것으로써 다시금 자신의 마음을 각성해 가는 그런 훈련의 삶을 살아가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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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마흔. 20세기 중반 서구 종교의 격변, 탈(脫)성경권위에서 인본주의 종교로 |
가장 객관적이므로 가장 허구적인 철학: 피타고라스와 소크라테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