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쉰하나. 로마제국 갈망의 게르만족과 중세의 타락
“모두가 로마인이 되고 싶어 했다.” 7-8세기 잉글랜드에 살았던 앵글로-색슨족들의 간절한 여망이었다.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그들의 이상과 ‘지상천국’은 로마였다. 게르만족의 후예인 앵글로-색슨족들은 동로마가 아니라 서로마의 백성이 되고 싶었다. 로마 가톨릭 신자가 되고자 한 데는 로마의 부와 영광이 자신들에게도 실현될 것이라는 희망의 논리가 지배하고 있었다. 교황이 살고 있고 로마는 정치와 경제와 종교가 통일된 지상에 실현된 하늘나라와도 같았다. “부유함, 포도주, 중앙난방, 문서보관 시스템, 그리고 두 개의 언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대표하는 로마제국”(529)을 잉글랜드에도 그대로 실현하고자 몰입했던 것이다. 어쩌면 얼마 전 거행했던 영국의 황제 대관식은 7-8세기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면서 로마제국의 영광을 갈망했던 그때 그 조상들의 DNA를 확인한 듯한 인상을 풍긴다.
부와 생활의 안락함뿐 아니라 7-8세기 앵글로-색슨족 사람들은 ‘의미’를 더욱 갈망했다. 당시 영주들과 왕들은 많은 성당(Cathedral)을 지어서 로마에 묻힌 베드로에게 헌정했다. 로마에 대한 그리움을 여과 없이 반영한 것이 아직도 영국 전역에 그 자취들을 남기고 있다. 잉글랜드 왕국의 기원인 웨섹스(Wessex) 왕국은 로마 가톨릭 체제를 숭상하여 국가 운영 체제를 그대로 모방하였다. 하나님의 화신으로 전 우주를 대표하는 교황이 살고 있는 로마에 대한 앵글로-색슨족의 동경이 얼마나 간절하고 애절했는지 영국의 교회사가 매클로흐는 다음과 같이 간명하게 정리한다. “잉글랜드의 부유함과 이탈리아의 태양 사이의 오랜 애정이 시작되었다.”(532) 앵글로-색슨족의 모든 영광은 오직 하나의 태양 로마로 향했다. 그런데 큰 문제가 있었다. 로마를 온몸으로 품고 살고 싶었지만 앵글로-색슨족은 로마에서 너무 멀었다. 로마는 앵글로-색슨족의 끈질긴 구애를 외면하고, 가까이 준비된 신부, 앵글로-색슨과도 일부는 같은 핏줄이 흐르는 프랑크 왕국을 신부로 택한다. 로마 교황청의 간택은 서유럽으로 향하지만 언제라도 도움을 청하면 달려올 채비가 된 대기 신부가 앵글로-색슨족 게르만이었다.
한편 8-9세기의 서유럽은 로마 교황청의 총애를 입은 피핀(Pippin)이 칼로링거 왕조(Charlemagne)의 토대를 놓고 있었다. 북동 프랑스 메츠(Metz)에서 로마 제국의 꿈을 실현하고자 했던 피핀 옆에서 한때 메로빙거 왕조의 공무원이었던 크로데강(Chrodegang)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이 자는 교황 권위와 메츠주 주교의 권한을 막강하게 키웠다. 로마 교황청의 지배를 받지만 로마 교황청의 부와 명예를 메츠에 이식시켰다고 하는 말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교황권을 강화하려는 개혁을 시도함으로써 메츠를 로마의 권위와 영광의 실체로 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목적을 실현하기 위해 로마에서 어떤 성인의 시신을 얻어오기도 했다. 성인(聖仁)의 권위는 예수 그리스도의 권위와 맞먹을 정도였다. 그는 피핀의 재정적 후원으로 교회를 신축하거나 재건축하고 3세기 감독들이 했듯이 순회 예배를 실행하여 로마의 영광을 메츠 구석까지 재현하고자 했다. 이러한 그의 행적은 카롤링거 왕조의 토대를 신의 이름으로 구축하려는 피핀 왕에게도 매우 유익했다.
피핀 왕은 통치권 장악을 위해 교황의 승인을 재빠르게 받았으며 롬바르드족의 이탈리아 침공을 막아냈으며 중앙 이탈리아를 교황에게 헌납했다. 중앙 이탈리아에 향후 1,000년의 교황령 통치를 선사한 인물이 피핀이었다. 이와 더불어 메츠의 종교적 실권자 크로데강의 중재로 교황청과의 관계가 더욱 돈독해졌다. (앵글로-색슨족이 원했던 것이 바로 이러한 관계였다!) 이 모든 영광은 피핀의 아들 샤를에게 영광스럽게 실현되었다. 샤를(768-814 재위)은 교황청으로부터 ‘위대한 샤를’ 즉 ‘샤를마뉴(Charlemagne)’라는 세례명을 얻는다. 그는 로마의 베드로 성당 지하실 베드로 앞에서 교황과 상호 동맹을 맺는다. 그야말로 누가 뭐라고 하더라도 샤를마뉴는 스스로 황제라 여길 수밖에 없었다. 800년도 성탄절에 교황 레오 3세는 샤를에게 황제 대관식을 치러 주었다. 하지만 레오는 교황으로서 황제에게 (존경의 표시라고는 하지만) 무릎을 꿇는 유일한 교황이었다는 오명을 남긴다.
황제 대관식 후 샤를마뉴는 동로마제국의 신학에도 맞선다. 즉 성상파괴 운동에 문제를 제기했다. 프랑크 제국의 감독들과 신학자들은 이것을 대대적으로 반겼다. 그리고 아우구스티누스의 삼위일체론을 근거로 니케아 신조의 ‘필리오케’(Filioque, 삼위일체의 이중발출론으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성령이 나온다는 주장)를 궁정 목사들은 동시 수도 아헨의 궁정 예배에 도입한다. 서방 가톨릭의 권위를 동방 교회보다 높이려는 이러한 시도를 황제가 주도하는 교황 중심의 종교개혁이라고 한다. 이후 1,000여 년의 로마 가톨릭이 지배하는 서방 제국의 역사가 시작하고 있었다. 이렇게 시작하는 제국이 역사적으로 ‘신성로마제국’이다. 맥클로흐는 이러한 서방 가톨릭의 역사에 대해 이렇게 평가한다. “그 제국 건설에 대한 교황의 참여는 그 우주적 역할에 대한 교황의 새로운 자기 확신의 극적인 주장이었고 그것은 라틴 서방의 활력이 돌아오는 것을 암시했기에 멈추지 않았다.”(539)
하지만 8세기 로마 교황은 현실에 만족하지 않고 황제를 통제하면서 동서제국의 유일한 실권자임을 확정 짓기 위해 문서위조 사기극을 벌인다. 바로 ‘콘스탄티누스의 기진장(Donation of Constantine)’ 사건이다. 로마 황제 콘스탄티누스 1세가 로마 교회에 토지와 권력을 기증했다는 위서 문서다. 로마 교회의 권력 확장과 교황의 권력 야욕이 만들어 낸 중세 유럽 최대의 문서 사기 사건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기극은 종교인들의 반성은커녕 더 큰 규모의 사기극을 만들거나 또 다른 방식의 조작을 위한 빌미를 제공했다. 맥클로흐의 평가다. “위조된 기증문서는 후대 교황들과 그들의 권력의 목회적 지지자들의 상상력에 불을 붙였고 그들은 그리스도의 교회가 모든 사회를 통치할 수 있다는 세계에 대한 선언으로 보았다. 이것은 웅장한 비전으로 볼 수 있다.”(540) 이후 로마 가톨릭 내부에서는 더 교묘한 방식으로 로마의 교황권을 강화하고자 했다. 기원이 불투명한 ‘이시도르의 서방 교회법(canon law)’을 통해 많은 지역 교회들이 개최한 공의회의 결정에 대해 그것을 기각하고 반대할 수 있는 권한이 교황에게 있다는 ‘거짓 법령집’의 확산에 큰 몫을 한다. 교황제 그 자체가 교회법이 되었다.
그런가 하면 수도원의 권력욕은 극에 달했고 중세를 암흑으로 몰아갔다. 카롤링거 왕조의 후원을 받은 플뢰리 수도원은 997년 이탈리아 성인 묘지 도굴은 물론이고 필사본들을 마치 권위 있는 문서로 조작하여 로마 교황과 협상하고 자신의 범죄를 ‘신성하게’ 포장하는 짓도 서슴지 않았다. 자신의 수도원은 “성 베네딕투스의 수호자이자 프랑스 최고의 수도원”(552)이라는 승인을 교황으로부터 얻어 낸다.
8-11세기까지 이어지는 이러한 종교적 거짓 술책들은 적어도 16세기 초 개신교 종교개혁까지 융성하여 그야말로 암흑천지의 중세를 만들어 버린다. 거짓 종교는 반드시 말과 글을 조작한다. 성경마저 조작하고 왜곡한다. 권력욕에 빠져버린 종교인이나 정치인이나 말할 것도 없이 그때나 지금이나 이것은 여전히 반복하고 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정답을 확정해야 한다. 결코 위조할 수 없는 ‘절대진리 하나님의 말씀 성경의 권위’ 확정 외에는 다른 진리의 길은 없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길 것임이니라 너희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눅 16:13)
<242호에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그 스승에 그 제자 |
타인 배려의 예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