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쉰셋.7-8세기 양성론과 이슬람, 거짓 기독교의 한 사례
“그것은[이슬람-필자 주] 칼로 세워진 권력이며, 기독교나 모세의 율법과 같이 신적인 기적으로 확인된 신앙이 아니다.” 이 인용은 7세기 말 동방 정교회 주교였던 헤나니쇼 1세(Henanisho I, 686-698 재위)가 이슬람 창시자 마호메트(Muhammad/Mahomet, 570-632)의 계승자로 자칭하는 압달-말리크(Abd al-Malik, 644/647-705) 칼리프(이슬람 지배자 호칭)에게 한 말이다. 칼로 세운 이슬람이므로 교단 설립 초기부터 이슬람 확장 방식은 군사력을 동원한 생존 투쟁의 양상을 띠며 향후 그 호전성은 유럽과 아프리카, 아시아 반도를 뒤흔든다. 8세기 이후 이슬람의 교세 확장은 1453년 동로마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함락으로 정점에 도달한다. 기독교를 국교로 삼았다고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보다 세속적 권력과 통치 방식을 따랐던 동로마제국은 8세기 이래 거듭하는 무슬림의 침탈로 규모 면에서나 기독교의 본질에서나 점점 쇠퇴해 간다. 이하에서는 이슬람의 설립 배경과 구약성경 및 신약성경의 일부를 임의로 차용하고 단일신론을 주장하면서 삼위 하나님을 부정하는 데서 출발하는 거짓 기독교 이슬람 초기 역사를 살펴보고, 이슬람 지역에 성경 진리에 바탕을 둔 복음 전파를 하나님이 어떻게 준비하고 계셨는지 생각해 보고자 한다.
‘이슬람(Islam)’이란 창시자 마호메트에 대한 ‘복종’이라는 뜻이며 ‘무슬림(Muslims)’은 마호메트의 가르침에 복종하고 그것을 따르는 ‘추종자들’을 일컫는다. 앞에서 인용한 대로 교파 수립 처음부터 정복 전쟁으로 시작한 이슬람은 창시자 마호메트가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의 일부를 임의로 차용한 데서 시작했다. 동로마제국 치하에서 자랐던 마호메트는 유대교에 친숙했다. 그가 가르친 경전(쿠란, Qur′an)을 보면 바울 사도의 글은 거의 거론하지 않지만 예수님의 모친 마리아에 대한 언급은 신약성경의 기록보다 거의 두 배가 된다. 신론으로 보면 단일신론(monotheism)을 신봉했으며 숭배하는 신은 ‘그 신’이라는 뜻인 ‘알라(Allāh)’다. 단일신론을 믿기 때문에 삼위 하나님에 대해서는 적대적이다. 쿠란에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신[알라-필자 주]을 믿고 그의 사자를 믿으라. 삼위일체를 말하지 말라…신은 유일하며 그분은 아들을 갖지 않으신다.”(405) 개신교보다 유대교 교리에 훨씬 적대적이었던 마호메트는 자신을 최후의 히브리 선지자로 여겼고 그래서 예루살렘 성전을 수복하는 일이 유일신론을 회복하는 것으로 보았다. 그래서 메디나에서 이슬람을 창시했을 때 그는 처음에 기도 방향을 예루살렘으로 향하라고 가르쳤다. 하지만 유대인들과 심한 대립을 겪으면서 메디나로 그 방향을 수정했다. 처음에는 유대인과 함께하는 연합공동체(움마, ummah)를 추진하기도 했다. 쿠란에 다음과 같은 에큐메니컬 연합 운동 대목이 나오기도 한다. “신자들[이슬람교인들], 유대인들, 그리스도인들, 그리고 [아라비아 단일신론] 사비교도(Sabians), 신과 최후의 날을 믿고 선을 행하는 이 모두는 주님으로부터 보상을 받을 것이다.”(406) 그래서 정복 전쟁 처음에는 마리아 숭배에 대해 관용을 베풀었기 때문에 당시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슬람을 새로운 아리우스주의 종파로 여길 정도였다.(407 참조)
이들의 경전 쿠란(Qur′an)은 아라비아어로 기록했다. ‘낭독해야 할 것’이란 뜻의 쿠란이 갖는 경전의 영향력은 아라비아어의 독특한 표현 양식에 있다. 그래서 쿠란은 다른 언어로 번역하지 않는데 특히 영어 번역을 기피했다.(403 참조) 이러한 이유에서 이슬람 신앙을 갖는 것은 경전을 ‘미학적으로’ 경험하는 것과 관련된다. 경전에 기록한 문자의 아름다움이 신에 대한 경험과 직접 연관되기 때문에 신에 대해 그림 등의 다른 표현 기법을 사용하는 것은 금기가 되었다. 하지만 시(詩)의 본성이 의미의 다양성을 열어 놓듯이 쿠란 자체의 변경 불가능성은 쿠란의 의미 면에서는 해석의 다양성을 열어 놓는다. 해석의 다양성으로 인해 종파 내의 갈등도 심각하게 된다.
7-8세기 팔레스타인과 시리아를 정복했던 이슬람은 분명 정복자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동방 교회의 문화에 대해 관용을 베풀기도 했다. 당시 이슬람의 정복에 대해 한 양성론 감독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 아랍인들은 우리 기독교에 대항해 싸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그들은 우리의 신앙을 보호해주었다. 그들은 우리 성직자와 성인들을 존경했고, 그들은 우리 교회와 수도원에 선물을 주었다.”(412) 이러한 처사에 대해 이슬람 내부에서도 의견이 갈렸다. 기독교의 금욕적인 성인들에 대해 문화적으로 존경해야 한다는 자들이 있었는가 하면, 정반대로 수도사들은 위험한 사기꾼이라고 주장하는 자들도 있었다.
양성론자들에 대한 호의와 함께 이슬람은 8세기에 바그다드가 학문과 문화의 중심이 된다. 이슬람 지도자 칼리프의 궁정의사 자리는 양성론자들이 차지했으며 천문학과 의학을 비롯한 고대 그리스의 천문학과 철학 사상들도 이슬람의 비호(庇護) 아래 서양에 역수입되고 있었다. 특히 이러한 몫을 담당한 자들이 ‘아바스 제국(Abbasid Caliphate)’의 군주들이었다. 8세기 중반부터 13세기 중반까지 500여 년 동안 양성론자들을 보호하면서 그들의 수많은 문헌과 과학 지식과 예술을 통해 이슬람식의 정치와 법률 나아가 종교문화까지 발전시키게 된다. 종교개혁의 전조가 유럽 곳곳에서 점점 몰려올 무렵 이 왕조는 내부 분란으로 망하지만, 초대 기독교가 인본주의로 퇴락하고 문예부흥이라는 인간중심주의 운동으로 꽃 피우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은 양성론 신학이 얼마나 성경에서 멀어진 사상인지 보여 주는 방증 자료가 된다. 나아가 단일신론을 표방하며 구약성경과 신약성경 일부를 인용하는 이슬람도 얼마나 거짓 기독교인지 잘 보여준다. 동방 정교회와 무슬림에 성경에 바탕을 둔 복음 진리가 전해지는 시간은 그 당시로부터 적어도 800여 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약속하신 예루살렘에서 땅 끝까지 바른 진리의 말씀이 전파되는 것은 분명히 성취되었고 지금도 성취되고 있다. 지난 교회의 역사도 그렇고 지금도 진행 중인 교회의 역사도 그 중심에는 성경만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이며 절대진리임을 확정 짓는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12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13 지으신 것이 하나라도 그 앞에 나타나지 않음이 없고 오직 만물이 우리를 상관하시는 자의 눈 앞에 벌거벗은 것같이 드러나느니라(히 4:12-13)
<246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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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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