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속물이 교양으로 둔갑하는 문화의 기만성에 대한 니체의 비판
문화는 무엇보다 어떤 민족의 삶의 표현에서 나타나는 예술적 양식의 통일이다. 많이 안다는 것과 많이 배웠다는 것은 문화의 필수적 수단도 아니고 징표도 아니며, 그것은 필요한 경우에는 문화와 대립하는 야만, 즉 무양식성(無樣式性) 혹은 모든 양식의 무질서한 뒤죽박죽과 잘 조화된다.
니체는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직후 독일 문화를 속물적 교양이라고 비판한다. 비록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프랑스의 문화적 교양에는 결코 미치지 못하는 프로이센 곧 독일의 문화를 야만으로 규정한다. 니체의 요구에 부합하는 문화란 반드시 예술적 양식들이 통일을 이룰 때 가능하다. 니체의 예술은 고대 그리스 비극 정신을 바탕으로 삼는다. 삶의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을 반영하는 비극 예술은 다양한 지식들을 지적 개념으로 모으는 방식을 통해서는 표현할 수 없다. 만약 문화를 특정한 개념으로 포착하고자 한다면 그것은 바로 문화의 타락이며 야만이 된다. 형식 논리적인 개념과 명제를 사용해 설득력을 보이는 방식으로 삶을 규정하는 것은 삶과 문화를 오히려 뒤죽박죽으로 전락시킨다. 삶을 이성적 판단으로 규정할 수 없다는 사실은 니체의 전체 사상을 지배하는 근본 전제라고 할 수 있다. 그런 면에서 개념과 명제의 형식 논리를 초월한 예술적 양식의 통일로서 문화는 반지성적이며 반이성적이다. 문명이 야만이 되고 야만이 오히려 문명이 되는 방식을 열어 주는 것이 니체가 말하는 예술적 양식의 통일로서 문화라고 할 수 있다.
19세기 말이면 모든 면에서 유럽은 이른바 발전하고 있었으며 낙관적 진보 사관이 지배적인 시기였다. 대학을 중심으로 축적되는 새로운 과학 지식과 기술의 발전은 약진하고 있었으며 다양한 분야의 지식들 또한 인간과 역사와 세계의 비밀을 모두 밝힐 수 있다는 자만심으로 가득했다. 이러한 상황을 니체는 거꾸로 보고 있었다. 문화의 발전이 아니라 모든 양식이 그저 무질서하게 뒤죽박죽되어 버린 규모 없는 야만의 쓰레기 더미라고 비판한다. 니체는 이러한 사실을 『반시대적 고찰』에서 폭로전을 벌인다. 어떤 지적 체계를 만들어 교양의 수준을 높이려는 발상을 야만 중의 야만이라고 혹평한다.
속물이란 (……) 예술을 관장하는 신 뮤즈의 아들, 예술가, 진정한 문화인의 반대를 지칭한다. (……) 지배권을 장악한 체계적 속물 문화는 바로 체계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아직 문화가 아니다. 그것은 나쁜 문화라고 할 수도 없으며 단지 문화의 반대, 즉 지속적으로 정당화된 야만에 불과한 것이다. (……) 교양 있는 속물의 뇌에서 분명 불행한 왜곡이 발생했다. 그는 문화의 부정을 바로 문화로 간주한다.(190-191)
문화의 건전성은 삶의 근본을 정직하게 보여주는 상식을 바탕으로 한다면, 문화를 지적 체계로 만들겠다는 것은 모종의 법률과 제도를 통해 인간과 역사를 지배하려는 음모가 작동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을 니체는 ‘체계적 속물 문화’이며 거짓으로 정당화한 나쁜 문화라고 비판한다. 이런 점에서 적어도 니체 당대부터 현재까지 서구 중심의 문화는 “지속적으로 정당화된 야만”이며 지구인들의 뇌신경과 뇌 구조까지 왜곡하고 병들게 한 교양을 가장한 사악한 이데올로기일 뿐이다. 다양한 지식과 정보를 지적으로 체계화하겠다는 속물 문화의 본성은 다름 아닌 타인의 문화를 지배하고 억압하겠다는 전체주의적 발상이다. 문화를 부정하는 것을 문화라고 유포하는 행위만큼 실존적 삶에 대한 더 큰 범죄는 없다. 고대 그리스 비극 정신을 삶의 본질로 파악한 이후 니체는 유럽 문화에 대한 비판의 강도를 높인다. 니체의 비판을 더 따라가 보자.
교양 속물 역시 요란스러운 장식을 좋아하며, 특히 자신만이 현실적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현실을 이 세상의 이성의 척도로 취급한다. 속물은 이제 누구에게나 그리고 자신에게도 사색하고, 연구하고, 미적으로 형상화하고, 특히 시를 짓고, 음악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것과 또한 철학을 허용했다. 단지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예전 상태로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이성적인 것”과 현실적인 것, 즉 속물은 흔들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195-96)
교양인처럼 행세하는 자들은 이성과 합리성을 금쪽같이 여긴다. 문학이든 예술이든 과학 연구든 철학이든 역사적 전통을 지니고 있으며 지녀야만 한다. 그러한 전통은 연속성과 지속성을 띠고 있으며 가장 이성적인 것이라고 주장하면서, 현실에서 지적으로 만족스럽게 파악한 듯이 정보를 조작한다. 이런 점에서 삶의 지속성과 온화한 개혁을 강조하는 보수주의적 성향은, 니체의 비판으로 보면, 현실 문화를 왜곡하는 일번지가 될 수 있다. 권력 집단의 사악한 음모를 지적 교양인임을 자처하는 자들이 모여 사실에 입각한 합리적 판단으로 둔갑시키는 일이 속물적 교양인들이다. 삶의 꽃인 문화를 권력 지배의 수단으로 악용하려는 자들의 지적 발광 속에서 삶은 황폐화한다. 삶을 파괴하는 문화가 마치 정상적인 문화로 둔갑하는 장면을 포착한 20대 중반 바젤 대학교 젊은 문헌학 교수의 고민은 더 깊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니체의 문화 비판 앞에서 기독교인으로서 올바른 문화에 대한 성경적 대안을 찾기에 고민할 수밖에 없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자녀들이 온몸으로 살아가는 삶이 그리스도 안에서 그 자체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구별된 삶으로 규정한다. 니체가 강변하는 예술로 승화된 삶으로서 문화적 교양은 피조물인 인간이 창조주를 대신해야 하며 자기 삶의 심판자가 자기 자신일 때 가능하다. 니체는 삶 자체가 수준 높은 문화적 교양으로 자리 잡도록 하기 위해 전통 기독교 문화를 해체하고 그 자리에 삶의 비극을 바탕으로 하는 고대 그리스 예술을 뿌리내리고자 한다.
고등학교 시절 이미 성경 진리에서 멀어진 고대 문헌학자 니체에게 성경에서 올바른 문화를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성경은 많은 곳에서 하나님의 백성들이 살아가는 현실이 그 자체로 신성하고 거룩한 삶이라고 밝히고 있다. 신앙인의 삶은 세상과 질적으로 구분된 영적 삶의 요소가 지배하고 있으며 창조주 하나님이 주관하는 완벽하게 아름다운 삶이 진행 중이다. 그래서 모든 하나님의 백성들 각각은 자신이 받은 은혜로 자신이 처한 환경에서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한 최적화된 교양인의 문화를 누린다. 그리고 성도가 진리 안에서 누리는 삶은 곧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신비하고도 거룩한 영적 삶이 되고 있다.
1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사로 드리라 이는 너희의 드릴 영적 예배니라 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3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중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롬 12:1-3. 강조는 필자에 의함)
<247호에서 계속>
|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남의 마음 살피기 |
공자의 음악 세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