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예순여섯: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귀족들의 교회 권력화
서로마 제국은 주후 408년 서고트족(Visigoths)의 왕 알라리크(Alaric, 370-410)에 의해 침략당한다. 당시 제국은 기근과 전염병 그리고 내부 반란과 왕국 배신자들까지 혼돈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알라리크는 로마를 공격하였으며 410년 로마 약탈(Sack of Rome)을 자행하고 그리고 방화한다. 베드로 대성당과 교회 일부만 남았으며 귀족들의 저택과 공공건물들은 참혹하게 약탈당했다. 그때까지 로마는 800년 동안 외부 세력에게 함락된 적이 없었다. 그래서 서고트족에 의한 410년 로마 약탈은 ‘영원한 로마’에 대한 환상을 무너뜨렸으며 이는 로마 제국의 몰락을 가속화한다. 그런데 이때 원로원 회원을 포함한 로마 제국의 많은 귀족들은 알라리크에게 공물을 바치기로 약속하면서 군 복무를 면제받고 생명도 보장받는다. 그런데 이 귀족들 상당수가 가장 안전한 은신처를 찾게 된다. 바로 수도원이었으며 이곳은 자신들의 부와 권력을 유지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이런 상황을 맥클로흐는 이렇게 정리한다. “이전에 제국의 공무를 담당했거나 그 안에서 공부를 시작했던 능력 있고 정력적인 사람들이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일은 교회로 들어가는 것이었다.” 이러한 배경을 고려할 때 로마 제국 쇠퇴기에 적어도 로마 교회는 ‘성경권위’를 지키면서 성경진리의 토대 위에 세우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순수한 교회와는 그 거리가 상당히 멀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러한 비성경적 교회 확장은 서로마 제국의 멸망 이후에는 더 가속화한다. 주후 476년 게르만 용병 오토아케르(433-493)는 로마의 마지막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투스(Romulus Augustulus, 475-476 재후)를 폐위시키고 서로마 제국을 역사 속으로 사라지게 한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고대 그리스에 연원을 두고 있는 유럽 고대의 종말이면서 또한 동시에 중세의 시작이라는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 후 정치권력을 상실한 많은 귀족들은 자신의 지위와 재산을 유지하기 위해 수도원을 도피성으로 택한다. 동시에 교회 권력을 장악하면서 서로마 제국의 영토를 ‘종교적으로’ 지배하기 위한 새로운 지배 구조를 건립한다. 예를 들면 원로원 의원이었던 카시오도루스(Cassiodorus, 485-580)는 제국의 멸망 후 수도원으로 들어가 학문 활동에 집중하면서 향후 중세 가톨릭 사상의 토대를 확립한다. 그는 자신의 영지에 ‘비바리움 수도원(Vivarium)’을 설립하고 고전 문헌을 연구하고 필사하는 학문적 중심지로 만든다. 그는 성경 연구와 고전 교육을 결합하는 학습 방식을 제시함으로써 중세의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학자들의 사상적 기반을 마련하게 된다. 그는 ‘신학 입문서(Institutiones Divinarum et Saecularium Litterarum)’를 저술하는데 이는 수도사들을 위한 학습서로 신학과 세속 학문의 조화를 강조하며 성경 연구와 고전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리고 그에 의해 로마 제국이 쇠퇴하면서 사라질 위기에 처한 많은 고전 문헌을 필사하도록 장려한다. 여기에서도 알 수 있듯이 서로마 제국 멸망 이후 전개되는 서유럽의 기독교 사상 곧 로마 가톨릭 사상은 아리스토텔레스, 키케로 등의 고전 철학과 혼합된 인본주의 사상으로 변질된다는 점이다. 이는 중세 신학이 왜 성경권위에서 점점 멀어지는 역사를 보여주는지 그 중요한 이유를 잘 보여준다. 그는 세속 통치자와 교회의 조화를 강조함으로써 후대 중세 가톨릭 사회의 왕권과 교권의 협력 관계 모델을 형성하는 데도 크게 기여했다. 이는 교회가 진리의 말씀보다는 정치적 권력 장악을 목표로 삼는 그야말로 세속주의의 전형적 모습이다.
그리고 로마 귀족 가문 출신인 그레고리우스 1세(Gregory I, 540-604)는 수도원장이 되었다가 후에 교황으로 즉위(590-604)한 인물이다. 그는 중세 로마 가톨릭의 기초를 닦은 교황으로 교황권 강화를 주도했다는 칭송(?)을 받는 인물이다. 황제를 칭하는 방식인 ‘그레고리우스 대제(大帝, Gregory the Great)’라는 칭호를 받은 최초의 교황이며 중세 로마 가톨릭의 행정과 선교, 신학과 예배 방식 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이렇게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로마 교회에서는 하나님 말씀의 권위가 사라지면서 기독교를 가장한 인간 권력이 지배하는 암흑의 시대가 준비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성경권위를 교황권(Papacy)이 대체하고 있었으며, ‘로마의 시장(Rector Romae)’으로 불릴 정도로 세속 권력도 막강해졌다. 6세기 말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e of Canterbury)를 영국에 파견해 앵글로·색슨족을 가톨릭으로 개종시키는가 하면, 켄트 왕국의 왕과 백성을 개종시키고 로마 가톨릭의 영국 국교화를 꾀하였다. 그뿐 아니라 서유럽 경계인 서고트족(Visigoths)과 롬바르드족(Lombards)의 개종을 촉진하여 교황이 지배하는 서유럽의 로마 가톨릭 체제를 확립한다.
성경권위에서는 점점 멀어지면서 서로마 제국의 수많은 정치 관료들은 로마 가톨릭이라는 종교권력을 절대화함으로써 로마 제국의 역사보다 더 긴 권력의 역사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앞의 교황은 로마 귀족들의 은신처였던 베네딕트 수도회(Benedictine Order)의 확산을 지원하면서 그곳을 학문과 신학 연구의 중심지로 만든다. 또한 가톨릭 예배 의식을 정교화하고 그레고리안 성가(Gregorian Chant)를 미사 종교 음악으로 정비한다. 기근과 전염병이 발생했을 때 교황은 로마 시민들에게 식량과 생필품을 공급하는 구제 사업을 추진하는가 하면 교회 재산을 활용하여 빈민을 돕고 사회적 안정을 꾀하였다. 『목회 규범(Regula Pastoralis)』을 통해 중세 로마 가톨릭 사제들의 직무와 역할 그리고 윤리 강령을 정립하여 목회 지침서를 만들고 『대화집(Dialogues』에서는 성인(聖人)들의 기적과 영적 경험을 기록하여 중세 로마 가톨릭의 신비주의를 조장(助長)하기도 했다.
그런가 하면 로마의 귀족 여성들도 수도원에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자신들의 권력을 형성한다. 귀족 출신 수녀원장(Abbess)들은 수도원과 수녀원을 교육과 행정의 중심지로 관리하면서 지역 사회에 영향력을 행사한다. 이렇게 교회와 수도원, 수녀원은 중세 로마 가톨릭 사회에서 새로운 정치·사회적 권력으로 성장한다. 이런 점에서 폐망한 로마 제국은 이제 ‘교회’라는 체제를 통해 라틴 문화를 계승하게 된다. 그래서 교황과 주교들 그리고 수도원장들과 수녀원장들이 로마의 귀족 가문 출신이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6세기 이후 교황직(Papacy)과 주교직(Bishopric)은 귀족 가문이 독점한다. 맥클로흐는 이를 이렇게 정리한다. “서방의 교회법은 12세기에 체계화가 되기 오래전부터 이미 서방의 지적 성취물의 하나였고, 서방 신학은 라틴어의 관료적인 엄밀함을 반영하는 깔끔함을 특징으로 하였[다.]”(494)
이처럼 로마 가톨릭은 점점 성경진리와는 거리가 먼 종교 집단으로 전락한다. 교회는 몰락한 로마 제국 귀족들의 권력 유지를 위한 종교적 ‘놀이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476년 로마 멸망 이후 원로원 가문의 절반 이상이 수도원과 교회로 이동한 것으로 추정하기도 한다. 엄격하게 말하면 멸망한 로마 제국이 이제는 종교 권력을 통해 ‘하늘나라’ 건설이라는 명목을 만들어 더 강력한 세속 제국을 만들어 또다시 타락한 ‘천년왕국’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런 점에서 중세 기독교는 본질에서 성경진리에 토대를 둔 건전한 교회가 아니라 그 태동부터 고대 그리스 문화와 라틴 전통을 계승한 이방 종교에 심각하게 오염된 체제였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270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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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해석의 과잉으로 인한 정신 질환들에 대해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