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순아홉:5-6세기 교리와 신조, 권력 유지의 수단으로 전락
서방 라틴신학 곧 로마 가톨릭 사상은 로마 제국주의의 유산을 바탕으로 삼고 있으며 그래서 “라틴어의 관료적인 엄밀함을 반영”하면서 동로마제국과 맞서는 역사를 전개한다. 서방 라틴 신학의 핵심은 삼위일체론이었으며 이 신학을 통해 서로마제국의 영광을 이어가고자 했다. 서방 신학은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라고 주장하는 아리우스주의를 철저히 배척하면서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는 서고트족(스페인)과 동고트족(로마 외의 이탈리아)을 서방 라틴신학으로 개종시켰으며 종속국으로 만들었다.
아리우스주의는 고트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사상이었다. 고트족을 개종시키면서 서방 로마 가톨릭은 콘스탄티노플의 동로마제국에 맞섰다. 아리우스주의를 철저히 배격한 것은 신학적 정체성을 확정하려는 것보다는 476년 멸망한 서로마제국의 영광을 기독교라는 이름으로 다시 재현하고자 하는 정치적 의도가 자리 잡고 있었다. 서로마제국의 후예들은 정치적 제국주의라는 옷을 기독교 제국주의라는 옷으로 바꿔 입었던 것이다. 삼위일체론은 분명 신학 이론처럼 보이지만 궁극적으로는 서방을 하나의 사상으로 통일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한다. 5-6세기 동로마제국도 아리우스주의를 배격한 것은 사실이지만, 이곳은 교리의 정통성을 황제가 공의회(Ecumenical Council)를 개최하여 자신이 결정했다는 점에서 신학 이론은 그 자체가 이미 정치적 권력의 도구로 전락해 있었다. 이후 벌어지는 동로마제국의 동방신학과 서방 라틴신학(로마 가톨릭)의 대립과 분열의 역사는 성경 진리의 순수함을 확인하고 건전한 신학을 수립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먼 기독교의 세속화와 타락의 과정이었음을 역사가 증언해 준다.
어떤 신조를 성경을 통해 확립하려는 것은 성경을 절대 진리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하고자 할 때 건전한 방향이 된다. 하지만 서방과 동방의 기독교는 정치적 목적을 위해 성경 진리를 수단으로 삼는다. 그래서 신학 이론에 대해 성경을 근거로 이의 제기를 하면, 신학 사상의 진리 여부를 떠나서, 정치 지도자 혹은 종교 지도자의 이해관계에 따라 ‘이단’과 ‘정통’이 결정된다. 이른바 신학적 논쟁이란 것은 성경 진리에 바탕을 둔 순수한 진리가 무엇인지를 확인하려는 것이 아니라 권력자들에게 무엇이 유리한지를 골라내는 과정으로 흘러간다. 그래서 ‘종교 재판’은 진리를 빙자해 정적(政敵)을 탄압하거나 제거하는 것으로 악명이 높다. 이러한 타락한 기독교의 가장 구체적 상징인 종교 재판의 역사가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의 역사와 함께 했으며 지금도 이어진다. 신학을 빙자해 자기 권력과 영예와 부를 유지하고자 하는 그 제국들의 수많은 후예는 지금도 동일한 불의를 반복한다.
당시 아리우스주의를 신봉한 고트족은 니케아 신조를 따르는 로마 제국 교회의 교리와 의도적으로 차별화하면서 종교적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이는 로마 제국의 영향력 아래 종속되지 않겠다는 정치적 목적을 확고하게 했다. 나아가 게르만 민족을 내부적으로 통합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으며, 아리우스주의는 이론적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로마식 삼위일체론보다 쉽고 단순했으며 그래서 더 쉽게 교리 설명을 함으로써 선교를 통해 국가적 통합을 이룩하기에도 훨씬 효과적이었다. 고트족을 포함한 여러 게르만 부족이 공통된 신학 사상으로 통일된 종교 체계를 기반으로 국가를 유지하는 시도는 이후 서방의 로마 가톨릭과 동방의 제국교회가 왜 각각의 신학 이론에 몰두하려고 했는지 그 이유를 분명하게 설명해 준다. 수많은 다수의 부족을 정치적으로 통합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다. 다른 민족을 정복하고자 피를 흘려야 할 때 폭압과 살상을 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악행을 정당화한다. 이렇게 380년 로마의 국교가 기독교가 되고, 476년 서로마제국이 망한 후, 로마 제국의 옛 영화를 다시 복구하려는 권력자들은 국교가 된 기독교를 철저히 정복과 지배의 수단으로 남용하게 되었다.
가령 게르만 민족의 일파였던 롬바르드족(Lombards)의 경우 이들은 아리우스주의를 통해 국가를 건립하고 운영했던 대표적 사례이며 결국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하여 민족의 명맥을 이어간 대표적 사례가 된다. 북유럽(스칸디나비아 또는 엘베강 하류) 지역에서 발원한 것으로 보이는 이들은 헝가리 지역을 경유하고 6세기 말 이탈리아 북부에 정착한다. 아리우스주의를 국가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상으로 수용한 이들은 568년 북이탈리아를 침입하여 그곳에 정착하면서 국가를 수립한다. 당연히 삼위일체론을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 세력(교황청)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7세기 중반, 롬바르드 왕 아리페르트 1세(Aripert I)와 그 후계자들은 아리우스주의를 버리고 니케아 신조에 기반한 삼위일체론을 신봉하는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북이탈리아를 점령했다고 하지만 북이탈리아 지역은 이미 오래전부터 로마 가톨릭을 신봉하고 있었기 때문에 아리우스주의로는 통치가 용이하지 않았다. 종교적 이념의 충돌은 국가 통일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으며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 간의 종교적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이유로 내부 민심을 안정시키기 위해서 아리우스주의를 버리고 로마 가톨릭의 삼위일체론으로 개종하게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과정에서 기독교 신앙은 세속적 욕망과 권력 지배의 수단으로 전락하게 된다. 롬바르드족 홀로 아리우스주의를 고집한다는 것이 이탈리아 지역에서 스스로 고립될 위험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점점 그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던 교황과 불화를 야기하는 것은 국가의 장래를 위협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서유럽 곳곳에서 아리우스주의를 따르던 민족들은 결국 로마 가톨릭으로 개종한다. 동고트족과 서고트족, 롬바르드족과 부르군트족 그리고 반달족 등도 모두 개종했다. 이렇게 정치권력자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종교적 이념은 세속적 욕망의 도구로 전락해 버린다. 삼위일체론이든 아리우스주의든 모두 권력 쟁탈과 패권 유지의 수단일 뿐이었다. 교리 자체의 진리성을 아무리 강조하더라도 이미 적어도 5-6세기 이후 동방이든 서방이든 성경 진리에 기반을 둔 순수한 진리는 거의 사라지면서 중세는 점점 ‘암흑기(the Dark Ages)’가 되어 갔다. 성경의 순수한 진리를 만날 수 없는 암흑기, 현재 한국 교회와 세계 교회에서 점점 어두움은 확산하고 있다.
<276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