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변증법보다 더 사악한 니체의 역사주의 해체 전략
바젤대학 문헌학 교수 시절 초기 철학에서 니체의 비판은 합리성의 이름으로 모든 것을 ‘역사화(Historisieren)’하는 일체의 독일 지성계로 향했다. 역사의 사악함은 무엇보다 먼저 모든 가치를 인간 정신이 시종 지배할 수 있는 역사적 산물로 환원한다는 데 있다. 합리적 기준으로 설명할 수 없는 충동과 모순, 갈등과 비극이 지배하는 인간의 삶을 시대적 조건과 역사적 맥락의 결과물로만 규정하려는 역사화에 대해 니체는 지적 퇴폐주의로 규정한다. 도덕과 예술, 종교와 진리의 방식으로 창출되는 다양한 가치들을 역사적 산물로 규정함으로써 진, 선, 미의 창조 가능성의 토대마저 억압하기 때문이다. 역사화는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폭력으로 삶이 의지할 수 있는 기초를 허물어 버린다.
나아가 역사화는 현재의 다양한 삶과 우연한 실존을 이미 종결된 것으로 박제하는 지적 사악함을 드러낸다. 현재의 삶을 살아 있는 것으로 대하지 않으며 인간의 무한한 의지(니체의 개념으로는 ‘권력 의지’)가 반영된 가치 창조와 투쟁, 고통과 다양한 종교 활동을 합리성 개념으로 이미 설명된 역사적 사례로 몰아넣는다. 그래서 역사화를 주장하는 자들에 따르면 ‘실존’은 그 자체 존재할 수 없으며 오직 박물관의 유물이나 해석의 대상으로 남을 뿐이다. 근대의 합리성을 생각과 행위의 바탕이라고 확신하는 역사주의자들은 결국 모든 가치를 역사적 구조 내에서 억압한다. 논리적 개념으로 명확한 진리 판단을 만든다고 하지만 그것은 실존의 의지력을 정교하고도 교묘하게 마비시킬 뿐이다. 이로써 역사화는 ‘지금-여기-이 모양’의 삶 곧 실존의 정당화를 박탈하는 사악함이다.
이로써 역사화는 결국 합리성의 이름으로 삶의 의지와 가치 창조의 근본 가능성을 억압할 뿐 아니라 극과 극의 선과 악이 충돌하거나 대립하는 다양한 문화를 ‘질병’으로 규정해 버리는 가장 사악한 단계에 이른다. 역사화를 강요하는 자들에게는 모든 가치는 역사적 산물이기 때문에 새로운 가치를 만들 이유 자체가 사라진다. 미래를 향한 의지적 결단과 창조적 발상 그리고 행위의 책임성이나 또 다른 희망의 상상력은 허구 혹은 환상일 뿐이다. 이러한 역사 환원주의를 니체는 중세와 근대의 심각한 질병 ‘페스트’에 비유한다. 삶을 해석하고 설명 가능한 ‘참’인 판단을 만들고 정교한 논리로 구성할수록 삶은 그만큼 말라 죽는다. 그래서 모든 것을 형식적 개념으로 환원하고 삶을 이해한다는 명목으로 진행하는 역사화 시도는 가치 창조의 근거 상실이며 삶의 의지의 마비이고 문화의 억압이며 실존의 죽음이다.
물론 니체는 삶을 죽음으로 몰아가는 질병인 ‘역사화’를 돌파하고자 한다. 니체의 말 “우리는 이 모든 것을 철학적 패러디 작가의 화려한 마술 거울 속에서 보면서 즐거워할 것이다”라고 선전 포고를 한다. 우선 니체의 이러한 관점에서 우리는 그가 역사화에 단순히 반대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오히려 니체는 더 높은 차원의 아이러니적 사유전략을 통해 역사화를 ‘반전’시키는 방식을 취하려고 한다. 철학적 패러디스트(parodist)가 되어 역사주의자보다 ‘더 사악한’ 아이러니적 발상을 하겠다는 것이다. ‘철학적 패러디스트’는 니체에게 모든 것을 역사화하고 해체하는 헤겔주의적 근대성 자체를 해체하는 은유에 해당한다. 즉 모든 것을 상대화하는 역사주의자들을 다시 상대화하는 자가 철학적 패러디스트다. 모든 것을 해체하면서 자기 자신을 절대적 비판자라고 착각하는 근대의 역사 변증법자들을 니체는 “십자거미”(364)에 비유한다. 앞뒤 전후 위아래 그물에 걸려든 모든 먹잇감을 체내에서 녹여버리는 거미를 퇴치(退治)하려는 것이 니체의 전략이다.
그리고 니체는 역사주의자들의 위협에 경악하기보다 이미 모든 전략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차분하게 완벽하게 대처할 수 있으므로 스스로 여유만만한 철학적 패러디스트라고 자칭한다. 변증법적 역사주의자들에 대해 여유 있게 대하면서 철저하게 박멸할 수 있다는 니체는 그 자신감을 괴테의 표현을 빌려 ‘사악함에 이를 정도까지(bis zur Verruchtheit)’라고 한다. 음흉한 도덕, 허구적 지식과 학문, 역사주의적 엄숙주의에 대해 냉소와 풍자 그리고 패러디의 전략으로 폭파시키겠다는 것이 니체의 ‘사악함’이다.
이러한 전략적 사악함을 니체는 “철학적인 장난”(365)이라고 한다. 헤겔의 ‘절대정신’의 사악함에 맞서서 니체는 19세기 독일 철학자 하르트만(Karl Robert Eduard von Hartmann, 1842–1906)의 ‘무의식의 철학’을 전위대로 앞세운다. 그는 쇼펜하우어식 비관주의나 헤겔의 역사주의를 해체하고자 했다. 하지만 그는 삶을 비관적 관점에서 실패한 것으로 규정한다. 인간의 고통을 창조의 계기, 삶의 극복과 전환의 기회로 삼지 못한다. 삶의 의지를 부정적으로 왜곡하는 하르트만은 ‘무의식의 형이상학’으로 근대 비관주의를 해체하려고 하지만 자기 스스로 삶의 부정하는 더 ‘슬픈’ 체계를 만들었을 뿐이다. 바젤대학교 젊은 문헌학자 니체는 이렇게 당대 모든 사상가들을 점점 자기 적으로 만들어간다.
<285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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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
일흔 셋. 보에티우스의 명암: 변절자인가 변증가인가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