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서양 근대 기독교의 뿌리: 야만(野蠻)과 광신(狂信)
모든 비그리스도교 종족을 가난하고 비참한 이교도라는 개념으로 묶어 버리는 이러한 태도에는 가소롭기 그지없는 야만성이 있다. 그 근저에는 유신론을 도의심과 동일시하거나, 또는 사람들이 신에 대해 가지고 있는 견해에 도덕 일반을 종속시키는, 엄청난 사고의 오류가 있다. 이제 개념들의 이러한 혼란은 사제들의 손에서 양날의 칼이 된다. 부분적으로는 사제들 자신이 그러한 혼란의 희생양이다. (……) 요컨대, 그리스도교 사제 계급은 이 세상의 모든 사제 계급에게 생명을 불어넣은 것과 똑같은 광신에 시달리고 있다. 비논리적 근거, 학교, 국가, 예술의 모든 관계에 주제넘게 뛰어드는 것, 근거를 향해 던져지는 권위의 말, 부적절한 자기 감정이 그 자체로서 인간의 축복에 연결된 것 등등 모든 사태가 여기저기서 다시 발견된다.(Friedrich Nietzsche, 「유고(1864년 가을~1868년 봄)」 니체전집1(KGW I4,II2,II4), 김기선 옮김, 서울: 책세상, 2003, 552-553.))
윗 인용은 루터교 목사 아들 출신의 21세 청년 프리드리히 니체가 내린 당대 서양 기독교에 대한 진단이다. 슐포르타 고등학교를 신학과 고전문헌학 분야에서 매우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하고 독일 본(Bonn) 대학에 입학한 신학생 니체는 신약성경의 문헌학적 비평 강의를 듣고 신학을 포기하고자 한다. 이 문제로 어머니와 심한 갈등을 드러내었던 상황에서 서양 근대 기독교에 대해 고민하고 정리한 내용이 바로 앞의 인용 내용이다. 물론 향후 그는 서양 기독교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가하면서 결국 ‘하나님은 죽었다’는 유명한 명제로 서양 기독교는 야만과 광신이 빚은 결과라는 단죄를 내려 버린다.
우선 청년 니체의 서양 기독교 본질에 대한 비판부터 따라가 보면서 왜 그는 정신병자 신세(45세)가 되는 향후 25년여 동안 서양 기독교에 대해 스스로 ‘적그리스도’ 노릇을 자처할 수밖에 없었는지 생각해 보자. 신학교 입학생 니체가 볼 때 서양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선악 이원론에 기초한다. 기독교도들은 모든 비기독교도들을 가난하고 비참한 이교도라고 여긴다. 이러한 판단에는 기독교도 자신들은 스스로를 부요한 자, 신분이 다른 거룩한 자로 여기는 이원론이 지배한다. 청년 니체가 볼 때 ‘가소롭기 그지없는 야만성’이 지배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양 기독교도들은 신을 믿는 자신에 대해 스스로 선한 자라는 자기 최면을 걸어놓고 착각 속에 살아가는 구역질나는 야만적 인간들이다. 서양 기독교도들이 ‘유신론을 도의심과 동일시’한다는 말이 바로 그런 뜻이다. 로마 가톨릭은 물론이고 이른바 종교개혁의 후예라는 루터교 사제들과 그 교도들도 비록 품위 있게 보이는 치장을 하고 꽤나 고상한 척하는 종교의식(儀式)을 거행하지만, 니체가 볼 때는 벌거벗은 몸으로 원시림에 살며 살육의 카니발 축제를 벌이는 원주민들과 결코 다를 바가 없다. 오히려 더 가소롭고 야비한 방식으로 자신의 욕망을 숨기면서 야만성의 극치를 보이는 자들이 니체가 보는 당대 기독교도들이었다. 특히 그가 태어나 자라고 고등학교에 다녔던 지방이 루터교도들이 지배적인 교회였으므로 로마 가톨릭의 의식을 반복하는 루터교의 종교의식과 그 행태를 보고 그러한 신랄한 비판을 할 수밖에 없었다는 것도 니체를 이해하는 배경이 될 수도 있다.
청년 신학도 니체가 보기에 가장 심각한 것은 신을 믿는 자신을 바로 도덕적인 선을 추구하는 인간으로 일치시킨다는 사실이다. 이렇게 하면 비기독교도는 말 그대로 ‘악인’이 된다. ‘기독교도는 선한 자, 비기독교도는 악한 자’라는 프레임은, 니체의 말로 보면, ‘엄청난 사고의 오류’가 발생한 결과다. 그리고 이러한 오류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제(司祭)들에게도 ‘양날의 칼’이 되어 자기 자신을 혼란의 희생양이 되도록 몰아간다고 비판한다. 왜냐하면 사제는 일반적 교도들과는 달리 종교적 야만 행위를 앞서서 항상 우선 실천해야 하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남들을 야만의 소굴로 몰아넣을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을 빠져나올 수 없는 야만의 늪으로 몰아가게 된다. 니체는 이러한 사제 계급들 즉 종교 지도자들이 마치 인류에게 생명을 불어넣을 듯 말하지만 그것은 자신들과 똑같은 ‘광신도’가 되도록 교묘한 방식으로 속이고 있을 뿐이라고 비판한다.
니체는 이 종교적 광신을 주도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섬뜩하고도 야비한 행태를 이렇게 끄집어 낸다. ‘비논리적 근거’로 말하며 ‘학교와 국가 그리고 예술 문제에 주제넘게 뛰어든다’고 비판한다. 학교 문제, 정치 문제, 극히 개인적 취향에 이르기까지 함부로 아무 사람에게나 들이대며 영혼의 상담자 노릇을 하려고 한다. 그리고 자신은 마치 세계와 역사의 근원과 근거를 알고 있는 듯이 꽤나 권위 있는 모양새로 말들을 던지지만 이 역시 광신으로 몰아가는 광란의 제스처일 뿐이다. 정신병자와 같은 지경의 부적절한 자기 감정을 절제 없이 쏟아내면서 이것을 하나님 앞에서 축복하는 과정이라며 자신을 따라오라고 말하는 사제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속임수를 청년 니체는 결코 묵과할 수 없다. 어쩌면 자신이 걸어가야 할 광신의 길이었기 때문에 더욱 광분(狂奔)하여 이러한 사실을 폭로한다고도 할 수 있다.
이제 대학에 갓 들어간 청년 니체의 서양 기독교 진단은 이후 그의 사상적 노정의 향방을 가름하게 된다. 이제까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읽었지만 도대체 논리적 통일성이 보이지 않던 성경에 대해 대학에서 처음 만난 ‘신약성경 원문비판’ 강좌는 성경을 인간의 편집물로 볼 수밖에 없게 했다. 고민 많던 청년 니체에게 성경원문 비판은 아마 ‘자유’였을 것이다. 진리의 말씀으로 자유하고자 했던 청년 니체의 고민 앞에는 성경 자체의 권위를 부정하는 일이 ‘거짓 자유’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래서 니체는 성경 안에서 발견해야 할 자유와는 영영 결별하고, 성경 밖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허구의 자유를 향한 광란의 몸부림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성경을 명확한 진리체계의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확정(www.ibt.or.kr)할 수 없는 모든 지식은 니체의 공격 표적이 되어 무너지거나 아니면 고민만 깊어져 니체가 걸어간 길을 따라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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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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