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세상을 제대로 알고 바르게 살아야
子張問 十世可知也
자장문 십세가지야
子曰 殷因於夏禮 所損益 可知也 周因於殷禮 所損益 可知也 其或繼周者 雖百世 可知也
자왈 은인어하례 소손익 가지야 주인어은례 소손익 가지야 기혹계주자 수백세 가지야
子曰 非其鬼而祭之 諂也 見義不爲 無勇也
자왈 비기귀이제지 첨야 견의불위 무용야
논어 「위정」의 마지막이다.
“자장이 물었다. 10년의 세상을 알 수 있겠습니까?”
“공자가 대답했다. 은나라는 하나라(의 규범)를 따랐기에 (은이 하나라의 규범에) 더한 것과 뺀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주나라는 은나라(의 규범)를 따랐기에 (주가 은의 규범에) 더한 것과 뺀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가 주나라를 계승하면은 100년 후라도 알 수가 있다.”
“공자가 말했다. 정당한 귀신다운 귀신이 아닌 데 제사하여 모시면 아첨하는 것이고, 의를 보고도 행하지 않으면 용기가 없는 것이다.”
하, 은, 주는 전통적으로 회자되는 중국 상고대의 대표적인 나라들이다. 하나라는 기원전 2070년경에 황허강 근처에서 성립된 것으로 보인다. 근대에 들어서서 황허강 근처에서 하나라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유물들이 발견되고 있다. 한자어 ‘夏’(하)는 오늘날의 여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본래는 문명화를 뜻했다. 즉 하나라는 이전의 문명화되지 못한 상태를 문명화시키는 역할을 담당한 것이다. 하나라는 마지막 왕이자 포악한 자인 걸(傑)왕대에 은의 탕(湯)왕에 의해 멸망한다.
은나라는 초기에는 상(商)나라로 기원전 1600년대에 성립되었다. 후에 은으로 바뀌면서 상(商)과 은(殷)이 함께 사용되고 있다. 은은 갑골문을 성립시켰으며 천문과 역법을 사용하였다. 점이 흥행하였으며 조상은 죽으면 하늘의 신이 되어 후손들을 돌본다는 조상숭배가 강했다. 은의 마지막 왕이자 폭군인 주(紂)왕대는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에 의해 멸망한다.
주나라는 기원전 1100년경에 성립되었다. 주의 무왕은 연합 부족들을 통해서 은나라를 정복하였기에 국가 장악력이 미약하였다. 영토는 넓고 강력한 통치가 어렵기 때문에 주왕조는 여러 지역에 각각의 제후들을 세워 봉건제도를 정착하였다. 한편으로는 은의 잔존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해 조상신 숭배 대신에 천명(天命)을 내세워서 신의 역할도 바꿔나갔다. 은은 중심이 조상신이지만 주나라는 천신인데 이 천(신)이 조상신보다 강하기 때문에 주나라가 은나라를 지배하게 되었다는 논리를 내세운 것이다. 당연한 이유에서 주나라의 왕은 ‘천자’(天子)로 호칭되었다.
공자가 귀신답지 않은 귀신을 제사하는 것은 아첨하는 것이라 한 것은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합당한 귀신이 아닌데도 귀신을 섬기는 것은 하늘에게 아첨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또한 주나라의 새로운 질서가 잡혔고 제후는 당연히 주나라 왕실을 섬겨야 하는 것이 의(리)다. 이러한 새로운 윤리를 보고도 실행하지 못하는 것은 용기가 없다는 것이다.
공자는 ‘주’나라 문명의 열창자다. “주나라는 하왕 상을 거울삼았는데 성하고 빛나도다. 그 문명이여! 나는 주나라의 예를 따르겠다.”(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논어, 팔일八佾). 이것이 공자의 소신이다. 그는 주나라의 천명사상에 충실하여 인과 예를 주장하기도 하였다. 이 원칙 하에서 귀신답지 않은 모든 존재를 섬기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공자의 입장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이 배워야 할 지혜는 모든 그리스도인은 각자의 신앙의 원칙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바울 사도는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엡4:13)는 것을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표 가운데 하나로 제시하였다. 그는 심령이 새롭게 되어 “하나님을 따라 의와 진리의 거룩함으로 지으심을 받은 새 사람을 입으라”(엡4:24)고 주장하였다. 바울 사도의 삶은 그가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율법의 삶에서 예수님을 만난 후의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자 했으며 새 사람을 입고 살아갔다.
대한의 모든 그리스도인이여! 공자가 주나라의 예 곧 천명과 천신을 중심으로 자신의 생활철학과 일체의 행동을 바꾸어갔듯이 우리 선한 그리스도인들도 하나님의 말씀 중에서 우리 자신들의 신앙 철학을 얼마든지 세우고 실천할 수 있다. 귀신을 섬길 수는 없지 않은가. 물질, 명예, 권력, 학력 등의 요소들에 지나치게 마음을 빼앗기지 말자. 바울 사도가 율법의 삶에서 예수님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고자 하며 새사람을 입었듯이 선한 그리스도인인 우리도 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먼저 솔선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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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어진 이가 예를 지킬 수 있다 |
노동의 존엄과 노예의 치욕 사이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