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바탕이 먼저, 꾸밈은 나중
子夏問曰 巧笑倩兮 美目盼兮 素以爲絢兮 何謂也.
자하문왈 교소천혜 미목반혜 소이위순혜 하위야.
子曰 繪事後素, 曰 禮後乎?
자왈 회사후소, 왈 예후호.
子曰 起予者 商也 始可與言詩已矣.
자왈 기여자 상야 시가여언시이의.
논어 3장 「팔일」의 계속이다.
자하가 물었다. “예쁜 웃음에 보조개의 예쁨이여, 아름다운 눈에 영롱한 눈동자여, 흰색으로 채색을 한다 하였는데 무슨 말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바탕이 먼저고 꾸밈은 나중이니라.”
자하가 말하였다. “예는 다음입니까?”
공자가 말하였다. “나를 일으키는 자는 상(자하의 이름)이로다. 비로소 그와 더불어 시를 말할 수 있겠구나.”
자하는 공자의 제자다. ‘천’은 보조개가 예쁘다는 말이다. 아름답게 웃는 모습 안에 보조개가 드러난 모습이다. ‘반(변)’은 눈동자가 반절은 검고 반절은 흰 눈을 말한다. 영롱한 눈을 반짝이며 말하는 모습을 비유한다. ‘소’는 비단과 같이 채색을 할 수 있는 바탕(본질)이다. 사람이 이렇게 예쁜 보조개가 있는 미소를 가지고 있고, 영롱한 눈동자를 가지고 있는데 또다시 여기에 채색으로 꾸미는 것이니 마치 흰 바탕을 가지고서 색을 덧칠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하지만 자하는 도리어 흰 비단을 가지고 채색을 하는 것으로 오해를 한 것 같다. 그래서 공자에게 물은 것이다.
그의 물음에 대해 공자는 그리는 일은 흰 비단(바탕)을 마련한 후에 하는 것이라고 대답하였다. 자하는 이 비유에서 비로소 사람의 바탕은 충성(忠)이나 신실함(信)이고 예 곧 형식을 차리는 것은 이러한 바탕들이 갖추어진 뒤의 일이라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공자는 이러한 깨달음을 원하고 있었다. 이렇게 깨닫게 하는 것이 선생님으로서의 본분이다. 그래서 공자는 자하가 원하는 대답을 하는 것을 보고 그가 스승인 공자에게 다른 제자들을 더욱 잘 가르치도록 분발하게 하는 자라고 칭찬을 한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과 깨달음이 이어져야 제대로 된 배움이 있게 된다. 이런 것을 가리켜 선생과 학생이 서로 배워서 학문이 증진된다고 하는 것이다. 문장이나 글자의 자구의 지엽적인 것들에만 집중하면 답답한 일일 수밖에 없다. 한정된 글자들의 영역을 넘어서서 마음껏 자신의 마음 상태를 표현하며 더 높은 이상을 꿈꿀 수 있는 시의 영역에서 노닐 수 있어야 학문의 정수로 다가가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교훈을 어떻게 그리스도인의 생활 속에 적용해야 할까. 그리스도인 역시 사람이기에 지나치게 교리나 성경 일부분의 자구에 매여서 살아가고자 해서는 곤란하다. 가정생활, 교회생활, 사회생활 등에서 주어진 일에만 몰두하고 그러한 삶을 통해서 더 넓은 삶의 의미를 깨닫지 못해서는 곤란하다. 교회를 섬기는 일이나 직분을 맡아 봉사하는 경우에 봉사나 직분의 수행으로 자신의 할 일을 다 하는 것으로 여겨서도 안 된다. 무엇보다도 자신의 깨우침에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과 교회와 사람에 대한 자신의 신앙을 분명하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찬양 봉사나 주일학교 교사의 직분 이전에 마음의 확신과 참 즐거움이 바탕이 되어 있어야 한다. 목사나 장로, 집사의 직분 이전에 그 자신의 확실한 믿음과 그 믿음을 유지할 수 있는 마음의 바탕이 갖추어져야 한다.
믿음이란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이고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다(히 11:1). 하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사람의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구체적인 실물로 드러나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누구든지 하나님을 형상화하면 우상숭배를 하는 일이다. 이 하나님을 볼 수 있게 하고 존재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다시 오심은 눈으로 볼 수 없고 실재하게 할 수 없다. 이 사실을 볼 수 있게 하고 실제 있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구원을 실재하게 하는 것도 역시 믿음이다.
그리스도인은 서로 간에 믿음으로 말하고 믿음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한다. 믿음으로 사는 자가 의인이다(롬 1:17).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않고 의롭게 살아갈 수 있는 길은 믿음으로 살아야 한다는 말이다. 언제나 무슨 일에서나 믿음으로 살아가면 하나님께로부터 의인이라 인정된다. 아브라함과 모세와 다윗과 선지자들이 그랬다. 로마 시대에 박해를 받아 죽어간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랬다. 토마스 선교사가 그랬고 주기철 목사가 그랬고 손양원 목사가 그랬다. 오늘날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의인들이 있다. 이 불신의 세상에서 하나님과 말씀을 온전히 믿으며 그 믿음을 전하는 그리스도인이 의인이다.
봉사나 직분은 모두 꾸밈이다. 그리스도인 자신이 자신의 믿음을 바탕으로 삼아 꾸며가는 것이다. 예배와 찬양도 충성과 봉사도 모두 믿음을 바탕으로 한 것이어야 한다. 헌금도 믿음을 바탕으로 하여야 한다. 마르틴 루터는 이 믿음을 교회의 바름과 오류를 구분하는 기준이라고 했는데 오늘날 믿음은 동시에 그리스도인이 자신을 분별하는 기준이기도 하다. 하나님과 성경을 믿는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승천과 다시 오심을 믿는가. 마지막 하나님의 심판을 믿는가. 이 믿음 위에서 자신은 소망과 즐거움을 누리는가. 인생이 끝날 때 하늘나라의 삶을 확신하는가. 모든 그리스도인의 일체의 삶은 오직 믿음에 토대된 것이어야 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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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전임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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