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식 행복추구의 불행: 기억과 망각 사이의 방황!
“가장 작은 행복에서도, 또 가장 큰 행복에서도 행복을 행복으로 만드는 것은 언제나 하나다. 잊을 수 있다는 것, 또는 학문적으로 표현한다면, 자신이 지속되는 동안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이 그것이다. 순간의 문턱에서 모든 과거를 잊으면서 정착할 수 없는 사람은, 또 승리의 여신처럼 현기증이나 두려움 없이 한 지점에서 서 있을 수 없는 사람은 행복이 무엇인지 결코 알지 못할 것이다.”(프리드리히 니체, 『반시대적 고찰』, 『삶에 대한 역사의 공과』, KSA I, 250쪽; 『비극의 탄생·반시대적 고찰』, 이진우 옮김, 서울: 책세상, 2005, 292쪽)
스위스 바젤대학 고전문헌학과 29세 젊은 교수 니체가 발간한 책에 나오는 내용이다. 뛰어난 천재적 통찰력과 해박한 지식을 온몸에 지니고 25세의 나이에 박사학위도 없이 대학교수가 된 니체의 입에서 행복의 요건은 ‘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달려있다는 말이 나온다. 탁월한 재능을 부러워하는 사람들을 또다시 기죽이는 듯한 니체의 이러한 자기비판은 자기비판을 가장한 자기 자랑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체가 그렇게 꼼수를 부리는 철학자는 아닐 터. 니체는 잊을 수 있는 생리적 현상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다’는 말로 정의하면서 인간 사고의 근본을 파악하는 원리로 삼고 있다. 역사는 과거에 의존해서만 가능하다. 기억과 연관된다. 그래서 비역사라는 말은 기억되지 않는 것이 갖는 삶의 효능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강조한다.
니체의 말을 더 따라가 본다면 삶을 지탱하는 힘은 망각을 어떻게 관리하느냐에 달려 있다. 순간과 순간을 이어가며 연속되는 시간을 마치 일관성 있게 살아가는 것처럼 느낄 때, 삶에 유익한 정보가 생각나기 때문에 살아간다고 말한다. 하지만 앞서 젊은 철학자 니체의 통찰을 보면 그렇지 않다. 순간순간 버티는 동력은 ‘망각’이며 바로 이 망각이 행복을 보장해 준다고 본다. 오늘도 이쁘고 사랑스러워 보이는 사람에게 ‘어제나 오늘이나 당신은 항상 사랑스럽다’고 말한다. 어제의 아름다움이 오늘로도 이어지고 그래서 항상 사랑스러운 사람으로 보인다.
하지만 니체의 관점에서 보면 추악한 것이 생각나지 않기 때문에 그 순간을 단지 견디고 있을 뿐이다. 이 말은 얼마든지 설득력 있다. 죽도록 사랑하겠다고 맹세하고 웨딩마치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한데 일순간 신랑 신부가 원수 사이가 되면서 파혼으로 다음 날을 보낸 신혼부부가 한두 쌍이 아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보면 이쁘고 사랑스러워서 결혼식장에 간 것이 아니고 상대방의 치사하고 욕심 많고 혹은 추악한 모습을 순간 ‘망각했기’ 때문에 손을 잡고 혼인서약을 했던 것이다. 아름다운 기억과 기대 심리가 큰 만큼 망각 장치가 그만큼 참아주고 있는 셈이다. 좋은 기억 자체란 없다. 좋은 기억이 지속하는 이유는 결코 생각하고 싶지 않은 악몽 같은 것을 망각할 수 있기 때문이다. 좋은 기억 때문이 아니라 좋지 않은 기억이 순간 지워졌기 때문에 삶이 유지된다. 행복은 아름다운 것에 대한 ‘기억’에 달려있는 것이 아니라 비극을 ‘잊을 수 있다’는 사실에 달려 있다. 니체는 이러한 맥락에서 동물의 생존 현상을 소개한다. “동물은 완전히 비역사적이며 거의 하나의 점과 같은 지평 속에서 산다. 그러나 동물은 적어도 권태와 왜곡이 없는 행복 속에서 살아간다. 다시 말해 우리는 어느 정도 비역사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능력을 더 중요하고 더 원초적인 능력으로 간주해야만 할 것이다.”(앞의 책(번역본), 295쪽) 권태와 왜곡이 없는 동물은 모든 것을 순간 모두 망각할 수 있다. 현재의 삶의 욕구에 충실하고자 하기 때문에 조금 전에 것도 모두 망각하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왜곡은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이전 사실이 모두 망각된 곳에 무슨 왜곡이 가능하겠는가. 즉 모두 망각하고 있기 때문에 순간순간 행복할 수밖에 없다. 물론 이러한 말은 동물에 대한 인간 중심의 해석뿐이다. 하지만 인간처럼 기억한다면 아마 동물들은 가축부터 ‘사악한’ 가축 주인을 향한 분노의 대반란을 시작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말에는 망각할 수 있다는 것이 인간에게 고유한 능력이라는 뜻을 담고 있다. 망각은 압착기처럼 짓누르고 있는 수많은 기억을 폭파하고 해체하기 위해 반드시 개발해야 할 필요가 있는 생존의 필수 전략이다. 교육의 패러다임이 혁명적으로 바뀌어야 할 판이다. 이제는 삶을 황폐하게 만드는 적폐적 암기목록들을 자신의 몸에 무리가 가지 않게 (배워서 저장하는 것이 아니라) ‘잘 지워가는 방법’을 교육해야할 것이다. 이와 같은 니체의 역발상은 근대적 통념을 깨면서 기억력이 아니라 ‘망각력’이 삶의 생존을 보장한다는 인상 깊은 명제를 제시하도록 했다.
그런데 기억이든 망각이든 인간이 과연 조절할 수 있을까? 인간의 중요한 생존 특성은 맞지만, 잊으려고 해도 잊을 수 없는 것이 천지이고 기억하려고 해도 결코 기억나지 않는 것도 천지인데. 동물의 망각구조가 부러워 보이는 듯하지만 동물의 망각은 자신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는 무의식과 망각의 연속일 뿐이다. 최소한의 부러움의 대상도 아니다. 그런데 신앙 선배들의 고민은 이미 니체를 앞지르고 있으며 그 정확한 대안과 대답까지 하고 있다. 베드로 사도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심판을 부정하는 거짓 선생들에 대해 이렇게 비유로 선포한 바 있다. “이 사람들은 본래 잡혀 죽기 위하여 난 이성 없는 짐승 같아서 그 알지 못한 것을 훼방하고 저희 멸망 가운데서 멸망을 당(벧후 2:12)”한다. 짐승은 자신이 하는 일이 도대체 무엇인지 알 수 없다. 잡혀 죽어가는 과정인지 살아가는 과정인지 결코 알 수 없다. 죽음에 임박하여 본능적으로 힘들어 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죽음 자체를 잊으려고 하거나 죽음 이후의 세계를 생각할 수는 없다.
망각과 기억, 분명 성도들에게도 중요한 삶의 요소들이다. 잊어버리는 것도 있고 새롭게 기억나는 것도 있다. 잡혀 죽기 위해서 난 짐승의 운명이 아닌, 주 예수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성도의 삶의 주체와 주관자는 우리 손에 있지 않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 자신의 망각과 기억을 조절할 수 없다. 무엇을 잊어야 좋은지 무엇이 기억나야 행복인지 이 모든 선택의 여지는 근원적으로 우리에게 있지 않다.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빌 3:13~14)
사랑하는 자들아 내가 이제 이 둘째 편지를 너희에게 쓰노니 이 둘로 너희 진실한 마음을 일깨워 생각하게 하여 곧 거룩한 선지자의 예언한 말씀과 주 되신 구주께서 너희의 사도들로 말미암아 명하신 것을 기억하게 하려 하노라(벧후 3:1~2)
이 모든 것은 주권과 은혜로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약속하신 바가 이루어지는 과정이다. 악몽이 연속해서 기억나는 순간이든 애달프고 가슴 아픈 망각이 이어지는 상황이든 모든 과정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살아계신 증거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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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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