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현대에서 니체식으로 살아남기: 최악을 최선으로 긍정하라?
“오직 새로운 목적과 새로운 방법이 있을 뿐, 공통의 형식은 존재하지 않고 오해와 경멸이 서로 결합해 있으며, 몰락과 부패, 최고의 욕망이 소름 끼치게 얽혀 있고, 선과 악의 온갖 풍요의 뿔에서 종족의 천재가 넘쳐흐르며, 아직 다 퍼내지 못한 지치지 않는 젊은 퇴폐의 특징인 새로운 매력과 베일이 가득한 채, 봄과 가을이 숙명적으로 동시에 공존해 있다. 여기에 다시 도덕의 어머니인 위험이, 커다란 위험이 다가오는데, 이번에는 개인 안으로, 이웃과 친구 안으로, 골목 안으로, 자신의 아이 안으로, 자신의 마음 안으로, 소망과 의지가 가지고 있는 가장 고유하고 가장 비밀스러운 모든 것 안으로 옮겨가게 된다.”(Friedrich Nietzsche, 『선악의 저편』, 니체전집14(KGW VI 2), 김정현 역, 서울: 책세상, 2002, 284쪽)
‘미래 철학의 서곡’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는 니체의 명저 『선악의 저편』에 나오는 구절이다. 인간의 모든 생존을 위협하는 은밀하고 교묘하게 다가오는 유괴범인 ‘도덕’을 유의하라는 경계를 담고 있다. 니체를 따라가 보면, 항상 존재하는 불변의 가치란 없음에도 불구하고 현대인들은 항상 존재하는 도덕적인 선으로서 그 무엇인가가 있어야 한다는 요구에 내몰린다. 그래서 고민하다 보면 마치 그 불변의 선은 있는 듯 착각하기가 일쑤다. ‘천륜을 어겼다’, ‘패륜이다’, ‘인간말종이다’ 등의 거센 아우성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게 되면 무엇인지도 모르는 ‘선한 것’이 반드시 있어야 한다는 맹목적 요구로 이내 내몰린다.
니체의 말대로, 늘 변하는 사회에서 그때마다 삶에 필요한 목적이 그럴듯하게 설정되고 그리고 방법이 뒤를 따를 뿐이다. 그것은 도덕적 선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해와 상호 경멸을 얼마나 더 치밀하고 정교하게 포장하느냐에 따라 희대의 대사기극이나 농단 사건으로 불리거나 적당한 사기극으로 지탄의 대상이 되거나 혹은 별로 주목받지 못하고 지나가는 삶을 위한 불가피한 사기사건 등으로 불린다. 사냥꾼이 설치한 정교한 덫이 필수적 생존수단인지 너무나 치사하고 간교한 올가미인지 구분할 길이 없다. 전체 인류를 일순간 몰락과 부패의 늪으로 던져버리는 위험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인간과 사회의 무궁무진의 개발 가능성이자 천재적 발상이라고 칭송한다. 역으로 보면 아직 드러나지 않는 잠재된 젊고 젊은 청년시대의 가능성은 다름 아닌 땅속에서 끓고 있고 곧 터져 나와 온 섬을 불바다와 잿더미로 만들 무서운 용암 덩어리가 바로 그 실체다. 가을 낙엽으로 지고 있는 것을 일시적 아름다움을 주는 단풍 빛에 속아 마치 봄의 생기로 착각하는 어리석음의 극치가 불편한 진실이다.
‘봄과 가을이 숙명적으로 동시에 공존한다’는 니체의 말은 한 손을 지키기 위해 한 손을 포기하거나 한쪽 눈을 보존하기 위해 또 다른 쪽 눈은 포기해야 하는 엄격한 시대적 논리에 대한 깊은 통찰로 보인다. 누가 혹은 무엇이 어떻게 내 몸에 생채기를 냈는가가 중요한 게 아니다. 그것은 숙명이며 동시에 절망과 안도(安堵)가 공존해야만 생명체로서 살아있는 증거가 된다는 말이다. 깊은 사유로 진술하지만 건드리고 싶지 않은 현대인의 약점과 상처임이 틀림없는 부분을 니체는 덮었던 붕대를 굳이 떼내어 쓰라린 아픔을 맛보게 하고 피를 보고 또한 그 피마저 아직 덜 깨끗하다며 무자비하게 싹싹 닦아버리려고 한다. 니체는 왜 이렇게 끝장을 보려는 생각을 이어가는 것일까? 인간의 삶, 생명의 기운, 창조의 생기를 황폐화시키는 가장 무서운 위험을 경계하기 위해서다. 바로 거짓으로 삶의 ‘모체(母體)’인 듯 속이는 인위적 ‘도덕(道德)’이 바로 삶 전체를 병들게 하는 악성 종양이다. 온몸 깊숙한 곳까지 감염시키지 않은 부분이 없고 전 인류를 병들게 하는 것이 ‘도덕 감정’이다.
이 도덕 감정은 인간에게 마치 고정된 선과 악이 마치 있는 듯 착각하게 만들고, 그리고 선과 악을 판단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속이고, 그렇게 하는 것이 ‘진리추구’라고 믿게 한다. 바로 이 지점에서 니체는 역발상의 필요성, 시대를 역류하는 비판적 사고의 대전환에 용기를 낼 것을 권한다. 그리고 상호모순의 현기증을 그대로 ‘긍정’하길 위험스럽게(?) 권한다.
차이와 차별의 경계를 구태여 찾으려 하지 말고, 다양성 존중과 치욕적 따돌림의 경계도 없애보라, 중요한 것과 사소한 것의 별 차이가 없다는 것을 인지하라, 독단주의를 경계하지만, 독단주의가 더 기승을 부린다는 필연성을 분명히 알라, 적과 동지가 되는 것이 정말로 ‘좋은’ 위험한 시대임을 알라, 해석의 다양성은 인정하되 창조적 발상은 적대적 관계를 유지할 때 더욱 빛난다는 것도 염두에 두라, 최악을 인정하지 않으면 최선도 있을 수 없다, 의도적 획일화와 자발적 동참의 경계가 모호한 시대다, 가상과 실재의 경계가 사라지고 비인간적 공학기술의 논리를 비판하지만 동시에 그 비판을 기술 논리에 의존하는 최악의 모순 속에 살아야 한다, 강릉 단오제 굿판과 교회 예배 시간은 구분되지 않는 시대다, 법당인지 교회인지 성당인지 결코 구분할 수 없는 혼돈이 삶의 진실이다. 삶의 의미를 두고 인내하는 것과 죽지 못해 사는 것의 차이를 묻지 말라, 사랑과 증오는 더 이상 대립개념이 아니며 얼마나 빨리 두 감정을 순식간 교체할 것인가를 고민하라, 수십 번 확인을 거듭한 계약서와 치밀하고도 완벽하게 꾸민 가짜 계약서가 동시에 필요한 시대다, 거짓말은 나쁜 것이 아니라 거짓말을 잘 활용해 모든 이에게 ‘성인(聖人)’으로 인정받는 전략이 필요한 시대다, 진리는 철저히 부정하면서도 동시에 거짓은 목숨 다해 긍정하려는 가장 골치 아픈 동물의 실체가 자기 자신임을 알면서도 그렇지 않다고 부정해야 하는 시대다.
니체를 읽으면 참 피곤하고 불편하지만, 그 피곤함에 지쳐가는 모습을 니체는 또한 긍정하려고 다가온다. 누가 누구를 속이고 있는지 그것도 경계가 없는 듯하다. 모두가 유한한 세계, 상대적 존재에서 생길 수밖에 없는 필연적 화법들이다. 그리고 이것은 단지 또 하나의 피조물로서 인간의 미약한 사유 방법의 반복일 뿐이다. 그때그때마다 삶을 나름대로 모면하는 한계가 분명한 방편일 뿐이다. 상대적 방법론의 연속으로 그야말로 소중하게 부여받은 삶의 에너지가 소진되고 있다는 것밖에 분명한 게 없는 것일까? 조금 심각해진 물음 속에서 우리는 성경의 명확한 진리로 마음이 가는 것에 또다시 감사할 뿐이다.
주에게서는 흑암이 숨기지 못하며 밤이 낮과 같이 비취나니 주에게는 흑암과 빛이 일반이니이다(시 139:12). 나는 빛도 짓고 어두움도 창조하며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하였노라(사 4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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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매사에 자세히 묻는 것이 예의다 |
공자는 주나라의 문명을,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명령을 따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