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6-12-28 21:2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초인(超人)’: 또 다른 짐승의 운명


“사람은 짐승과 위버멘쉬 사이를 잇는 밧줄, 심연 위에 걸쳐 있는 하나의 밧줄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머리말> 4: KGW VI 1, 10쪽).

언어적 사유와 이성적 판단을 하는 사람과 전혀 다른 종류의 생물인 짐승은 잔인성과 야수성을 본성으로 한다. 짐승이라고 할 때 우리는 인간의 도덕적 판단을 적용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짐승이라고 하면, 사람의 반대말이 된다. 사람 편에서는 사람과 짐승이 결코 함께할 수 없는 분명한 차이와 그 기준 있음을 전제한다. 그런데 니체는 사람을 짐승과 일단 연관시킨다. 단순한 생물학적인 범주와 종차(種差)를 밝혀가면서 사람과 동물을 연관시키려고 한 것은 아니다. 니체가 당시의 진화론에 영향을 받았다고는 하지만, 니체 사상의 핵심적 근거가 되는 것은 아니다. 
니체는 사람을 정의하면서 짐승과 ‘위버멘쉬’를 연결하는 밧줄에 비유한다. 위버멘쉬는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초인(超人)’이라고 번역하는 위버멘쉬는 니체 철학의 핵심이며 그가 제시하는 인간상(人間像)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니체가 꿈꾸는 미래의 인간 형상이다. 기독교 중심의 유럽 문화를 뛰어넘어 기독교 문화로부터 자유로운 새로운 인간형이다. 짐승의 본성을 야수성이나 자인성이라고 한다면, 위버멘쉬는 이러한 짐승 본능을 무조건 단절하는 방식으로 존재하지는 않는다고 할 수 있다. 인간에 대한 정의를 초월적인 신의 피조물의 틀을 통해 설명하지 않고, 철저하게 내적 충동과 의지를 통해 인간을 규정짓고자 하는 것이 니체의 의도이기 때문이다. 위버멘쉬 등장의 이유는 짐승의 본성이 사람을 통해 그리고 그 사람의 상황과 관련 맺으면서 또한 사람은 왜곡된 기존의 인간상을 넘어서 새로운 능력을 소유한 자로 거듭날 수 있는지 그 여부를 따져보는 데 있다.
우선 분명한 것은 니체에게 위버멘쉬는 인간의 모든 정황을 넘어선 초월적인  어떤 신적 존재를 뜻하는 것은 아니다. 철저하게 이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순과 갈등, 긴장과 투쟁의 현장, 이 대지(大地) 위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다. 대지에 뿌리를 내리는 존재란 이 지구에서 일어나는 생존 투쟁의 모든 현상에서 무수한 힘들의 역학 관계 속에서 자기를 인정하는 즉 자기 긍정의 당당함을 구현하는 존재다. 이 존재가 가지는 정신이 ‘자유’라고 할 수 있다. 생과 사의 극단적인 문제를 직면할 때 오히려 자신의 모습을 인정할 수 있는 ‘운명을 사랑하는 자’, 이 모습에서 구속받지 않는 자의 근본 특성을 ‘자유’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힘의 엄정한 논리를 부정하면서 자신의 이해득실을 따져보며 타인을 향해 원망의 피눈물을 흘리며 남의 탓 하는 경우를 넘어서려는 힘겨운 자기 극복을 시도하도록 하는 동력(動力) 정도로 말할 수 있다.
니체가 말하는 위버멘쉬의 자유는 매 순간 새로운 가치 창조를 중단하는 것을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스타일이다. 그런데 이 가치 창조 속에서 찾는 자유는 반드시 겪어야 하는 과제가 있다. 자유에 대해 엄청난 힘의 구속이, 그리고 창조에 대해서는 무서운 허무가 동시에 짓누른다. 3천 년 지혜자의 왕 솔로몬이 절규한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전 1:1)’는 진리는 니체의 자유에 내려진 이미 약속된 진노의 코드라고도 할 수 있다. 니체의 가치 창조 행위는 창조만큼 커지는 허무의 장벽을 직면해야 하는 자유다. 이것이 운명인 이유는, 창조하지 않으면 허무를 알 수가 없고, 가치 창조에 열정을 쏟을수록 소멸과 파괴의 당위성도 그만큼 커진다는 자기모순 때문이다. 
니체 사유를 따라가면, 이렇게 힘겨운 자유는 짐승의 야수성과 사람이고자 하는 고급스러운 가치 창조의 열망 사이에서 방황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짐승의 본성을 얼마만큼 어떻게 극복하느냐의 문제는 나중 문제가 된다. 왜냐하면 자유의 문제에 직면하면, 짐승처럼 된다고 해도 더 발전된 인간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자신에게 있는지 자각하거나 확신하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고귀한 가치를 창조하여 고급스런 품격을 일시적으로 갖춘다고 하더라도 안주하지 않으려는 부단한 자기 극복의 창조력을 볼 수 없다면, 아무것도 아닌 것이 바로 사람이다.
팽팽한 힘의 긴장이 지배하고 극한 가치의 대립으로 갈등과 투쟁의 양상이 점점 험악해지는 이 ‘대지’ 위에서, 짐승과 같은 본능으로 견디는 듯 보이지만, 가치 창조의 자기 가능성을 자기 내면에서 감지할 수 있는 자가 위버멘쉬다.  위버멘쉬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니체의 책 제목에서도 보듯이, 선과 악의 판단에서 자유로운 ‘선악의 피안’에 있는 존재다. 한편으로는 본능에 희생양이 되는 인간의 모습이 불쌍하기도 하지만 또 다른 한편으로는 희생의 순간에도 정말 동물과는 질적으로 다른 차원 높은 창조의 원동력을 볼 수 있는 스타일이다. 때로는 약육강식의 현장에서 포식자의 먹잇감이 되는 가젤처럼, 때로는 짐승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 정신적 위력을 발산하는 모습이 교차하는 곳이 바로 짐승과 위버멘쉬의 공존 공간, 그곳이 바로 ‘사람’이란 존재가 사는 곳이다.
절대 가치로서 신의 죽음을 선언한 현대 철학자 니체 이후, 현대 철학자들은 선과 악의 판단 기준이 존재하지 않는 시대를 살고 있고 지금도 그 가운데서 방황하고 있다. 앞선 설명으로 보자면, 방황하는 현대인은 니체의 설명으로 다시 표현하면 짐승 모습의 위버멘쉬와 사람 형태의 위버멘쉬 사이에서 규정될 수 없는 무규정적 존재다. 위험한 외줄을 타면서 죽음과 삶을 구분할 수 없는 운명을 짊어진 존재다. 사는 것이 저주인지 축복인지 결코 가름할 수 없는 처지에 있다.
위버멘쉬로서 방황하는 삶의 진실은 매 순간 짐승과 별 차이 없는 운명이라는 사실이다. 사람이고자 자유를 향한 몸부림이 강한 만큼, 그 진실성은 금세 야수성이 지배하는 짐승으로 추락한다는 것도 인정해야 하는 신세다. 위버멘쉬를 추구해야 하는 인간은 또다시 짐승의 운명임을 재차 반복할 뿐이다. 앞서 최고의 지혜와 자유 나아가 부와 명예를 거머쥐었던 지혜자 솔로몬의 인생과 짐승의 먼 것 같지만 별 차이 없다는 그의 말을 다시 깊이 새겨본다.         

내가 심중에 이르기를 인생의 일에 대하여 하나님이 저희를 시험하시리니 저희로 자기가 짐승보다 다름이 없는 줄을 깨닫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노라 (전 3:1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가난하지만 즐거워할 줄 알아야
군자는 배부름을 구하지 않아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