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의 운명론: 필연과 우연 사이에서 방황하라!
니체가 바라보는 세계는 수많은 힘들이 서로 투쟁하는 현장이다. 투쟁은 반드시 대립과 갈등을 낳는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속에 살아가는 인간에게 발생하는 삶의 다양한 형태는 생존 투쟁의 갖가지 양상에 불과하다. 따라서 생존을 위한 투쟁에서 인간이란 존재는 단지 힘의 강하고 약함으로 파악되는 존재일 뿐이다. 참이든 거짓이든, 정당하든 부당하든, 유리하든 불리하든, 행복하든 고통스럽든 인간의 모든 지식과 감정을 지배하는 것은 다양한 힘들의 이합집산이다. 소위 다양한 ‘권력투쟁’의 현장에서 ‘만들어지는’ 존재가 바로 인간이다. 만들어지는 존재, 때로는 살기도 하고 때로는 죽기도 하는 존재다. 이러한 삶과 죽음의 기로에서 최선과 최악의 세계를 쉼 없이 오고가며 방황하는 존재가 바로 니체가 파악한 인간이며 또한 니체 자신이기도 하다.
인간은 때로는 지배하는 자로 때로는 지배당하는 자로 끝없이 반복한다. 세상 모든 사람이 이렇게 존재한다고 보면, 어떤 고정된 절대 권력의 권좌(權座)란 분명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그 권력의 중심은 항상 움직이기 때문에 세계를 지배하는 중심도 어떤 곳에 붙박일 수 없다. 예를 들면, 세계 역사에서 권력의 중심은 항상 변했다. 그래서 니체는 중심은 어디에나 있다고 한다. 물론 중심을 만들어 내는 원동력은 갈등과 투쟁을 일으키는 다양한 힘들의 관계다.
니체에게 모든 사건이 대립하는 힘들이 지배하기 때문에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모든 사건은 일어날 것이 일어나고 있다. 권력관계는 항상 이동하면서 모든 것을 삶의 필연적 계기로 만든다. 니체의 논리대로 본다면, 인간의 운명은 힘의 관계가 지배하고 있으므로 역동적으로 살다가 역동적으로 사라지는 과정이다. 대립하는 힘들이 분출하는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의 현장에서 인간은 자기 의식적인 생생한 느낌으로 생과 사를 항상 경험하고 있다. 니체는 이렇게 정리한다. “있는 것은 아무것도 버릴 것이 없으며 없어도 좋은 것은 없다.”(프리드리히 니체, 『이 사람을 보라』, ‘나는 왜 이렇게 좋은 책들을 쓰는지’-비극의 탄생 3: KGW VI 3, 309쪽) 니체에게는 그 무엇도 실수로 우연히 발생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힘들여 지워야 할 것은 도대체 없으며 어떤 하찮은 것도 부정해야 할 것은 더더욱 아니다. 있어야 할 자리에 그대로 정확하게 있다는 말은 그렇게 정해져 있었다고 해도 될 것이다. 그래야 니체의 말대로 운명이 되기 때문이다. 이 운명을 지배하는 힘의 지배 관계 속에서 개인의 유불리를 따지지 말고 어떤 후회와 타인 탓 없이 그대로 그 운명을 적극 수용하는 것이 또한 ‘기계적 운명론’이 아니라 ‘역동적 운명론’이다.
니체식 운명론자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 동정심을 얻으려고 하지 않는다. 니체에게 동정심의 본질은 운명에 대한 자기 긍정이 힘든 자들이 구걸하는 태도다. 연민을 구걸하는 자들은 세상을 대할 때 일어날 일이 일어난 것으로 파악하지 않고, 일어나지 말아야 하는 것이 재수 없이 일어났다고 보는 자들이다. 이들은 온갖 피해의식 속에서 자기 삶을 한탄하는 그야말로 증오와 원한에 사무친 패배적 운명론자들이다.
니체는 서양 기독교를 비판하면서 앞서 지적한 동정심에 구걸하는 행위를 마치 구원에 대한 간절한 기도처럼 조장하고 인생 패배자들은 마치 구원을 받아 마땅한 대상으로 조작한 자들을 비판한다. 바로 유대인들이며 자기 운명에 대해 타인 탓하며 원한감정으로 살아가는 패배주의적 기독교도들이 대표적이다. 얼핏 보면 이들은 자기 정립이 충분히 잘 되어있는 것처럼 보인다. 자기만족과 행복이 충일한 사람처럼 보인다. 하지만 니체가 보기에 이들은 결코 자신에게 만족하지 못하며 주어진 현실에서 자기 불만족에 지배당한 자들이다. 자기 운명을 사랑하는 것과 거리가 먼 자들이며 매사에 주위 환경과 타인에 대해 증오와 복수심이 꽉 찬 자들이다.
이웃사랑은 고사하고 이웃에 대한 증오심이 꽉 차 있는 자들이다. 다른 사람을 돌아볼 수 있는 최소한의 힘이 완전히 소진된 삶의 패배자들인데, 이들이 타인을 배려하겠다고 ‘동정심’을 운운하는 것을 보면 니체로서는 역겹기 짝이 없다. 이렇게 비열한 의도를 가지고 그들이 운운하는 동정이나 이웃사랑은 자기편이 되는 사람들을 골라낸다. 그리고 자신들처럼 소심하고 비겁하고 유약한 그들에게 삶의 패배의식과 원한감정을 감염시킨다. 이러한 자들은 그야말로 삶을 병들게 하는 악성 종양이며 시러베자식보다 못한 자들이다.
니체의 천박한 동정심 비판은 분명한 목적이 있다. 나약함에 병든 자들이 어쭙잖은 동정심을 베풀면 이러한 연민과 동정은 건강한 자들에게도 이내 정신 건강을 해치는 악성 종양이 된다. 니체는 삶을 병들게 하는 이러한 연민의 동정심이 유럽을 병들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이라고 본다. 그래서 니체는 동정심에 대해 처음부터 끝까지 파상적 공세를 펼친다.
니체는 이렇게 인간의 도덕적 본성을 비열한 본능으로 정죄한다. 도적이 삶을 건강하게 하기는커녕 유럽 정신사 2,000년 이상 병들게 했다고 비판한다. 니체는 이러한 심각한 문제 발견에서 자기 철학을 시작해야 했다.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어렸을 때부터 신을 향한 엄격한 경건의 훈련을 받으면서 적어도 십 대 후반까지 그렇게 도덕의 노예로 길들여졌다. 하지만 고등학교 시절을 겪으면서 이 모든 것은 산산조각이 났다. 가장 혐오할만한 것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강요받으면서 자랐던 과거를 청산하고 그의 말대로 ‘다이너마이트’로 기존의 유럽 기독교의 허구를 폭파하고 해체했던 것이며, 그 결과는 결국 도덕 뒤에 숨어 있는 신을 죽여 버린다.
인간의 삶에서 위선을 발견하는 것과 위선이 아닌 진리를 발견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니체는 도덕의 위선을 파헤쳤지만, 그가 어렸을 때 읽었던 성경 진리로 돌아와 진정한 자유를 발견할 수는 없었다. 단지 또 다른 자기 굴레를 만들며 ‘네 운명을 사랑하라!’는 힘겨운 절규로 자기 삶을 마감한다. 우리는 보혜사 성령께서 바울 사도를 통해 인간 행위의 거짓과 허구성을 폭로한 것을 다시 마주하게 된다. 영혼의 자유는 오직 절대 진리의 자유로부터만 가능함을 새삼 강조하게 된다.
18 누구든지 일부러 겸손함과 천사 숭배함을 인하여 너희 상을 빼앗지 못하게 하라 20 세상에 사는 것과 같이 의문(儀文, 외형적 의식 복종을 강요하는 명령들-필자 주)에 순종하느냐 23 이런 것들은 자의적 숭배와 겸손과 몸을 괴롭게 하는 데 지혜 있는 모양이나 오직 육체 좇는 것을 금하는 데는 유익이 조금도 없느니라(골 2:18, 20,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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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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