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7-12-20 21:58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노동의 존엄과 노예의 치욕 사이에서


“실존 그 자체가 아무런 가치도 없기 때문에 노동은 하나의 치욕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니체전집 KGW III 2, 유고 1870년~1873년, 『씌어지지 않은 다섯 권의 책에 대한 다섯 개의 머리말: 3. 그리스 국가, 머리말』, 이진우 옮김, 서울: 책세상, 2001, 309쪽.)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의 인생관이 농도 짙게 배어 있는 부분이다. 목사의 아들로부터 시작해서 신의 죽음을 외치고 11년을 정신병자로 누워 있다가 20세기를 시작하는 해(1900년) 운명을 맞은 그의 일생을 반영하는 자기 고백처럼 들리는 말이다. 니체의 허무주의 철학에 의하면, 인간은 뜻하는 바를 항상 추구하는 삶이지만 찾고자 하는 의미는 결코 얻을 수 없다. 인간으로 살면서 의지와 노력을 통해 뜻하는 바가 없이 사는 인간이란 없다. 하지만 그 뜻하는 바가 도대체 무엇인지 결코 만날 수도 없는 것이 인생의 딜레마다. 왜냐하면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에게는 고정불변의 가치란 존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만들지 않을 수 없고 이내 파괴할 수밖에 없는 저주받는 밀랍의 날개를 달고 태양을 향해 날아오르는 이카루스의 운명과 같은 존재가 바로 인간이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노동이 살기 위한 행위인지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몸부림인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비인간적 ‘갑질’에 처참하고도 부끄럽게 당하면서도 현대인은 누구나 자기 일에 대해 존엄한 노동의 대가를 바란다고 하지 치욕스러운 노예 수당을 받는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절대적 가치 기준을 붕괴시킨 니체의 주장을 따르면 존엄과 수치의 경계는 분명하지 않고 모호하다. 노예제도가 폐지된 사회에서 살고 있는 우리라고 하더라도, 권력과 자본과 제도 앞에서 이루어지는 상황을 보면 이러한 짓이 과연 짐승과 사람의 경계가 분명한 것인가를 의심하게 한다. 멀리 가지 않더라도 국내의 10대 기업이 나라의 현금 절반을 가지고 있는 우리 사회의 구조를 보면 ‘노동의 존엄’은 그야말로 치욕스러워서 견디지 못하고 억지로 만들어낸 수사(修辭)에 불과한 것 같다.

생산현장에서 기계가 더 귀한지 노동자가 더 귀한지가 불분명하게 된 것은 오래전이다. 기계를 보호하려고 출근하는지 근로자의 삶이 보호받기 위해 출근하는지 두 번 이상 물으면 넘어서지 말아야 할 금기(禁忌)를 깨어버린 느낌마저 든다. 가련하기 이를 데 없는 처지에 고통스러운 삶의 현장을 자기 스스로 ‘존엄한 근로보장권’을 행사한다고 평가하기에는 두 번 울고 싶은 심정이다. 치욕스러움을 언제까지 숨겨야 하는지 소외감(疎外感)은 울분을 넘어 공포감으로 밀려온다. 허무주의 철학자 니체는 과학혁명과 산업혁명으로 잘나가는 19세기 유럽의 한복판에서 사회의 표면적 노동구조만이 아니라 노역(勞役 혹은 奴役)으로서 인간 삶의 무거움에 대해 심각한 지적을 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노동의 존엄’을 말하고 ‘일자리의 축복’이라는 말을 만들어내는 자들이 노동자들이 아니라 사악한 영업주와 그러한 세력들일 확률이 높다고 니체는 지적한다. ‘자아실현’이라는 말은 자본권력이 죽을 때까지 자신의 손아귀에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명령을 숨기고 있는 거짓말이다. 그래서 니체는 이러한 현대인의 노동구조를 감시하고 제재하는 ‘경찰’ 권력에 비유한다. 니체는 강하게 말한다. ‘높은 급여가 비참한 삶을 극복하게 한다는 것은 어리석은 신념이다.’ 그러면서 니체는 『아침놀』 3권 206에서 “가난하면서도 즐겁고 노예라는 것! 이것도 가능하다”고 한다. 하지만 이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가난하기를 결코 원치 않는 현대인 대다수 군중들에게는 비현실적이지 않느냐의 반문에 침묵할 수밖에 없다.             

니체의 고민을 가로질러 노동할 수밖에 없는 인간의 운명을 근본적으로 해결해 가는 성경의 안내를 받아보자. 니체의 고민이 설득력 있는 문제 제기지만,  그의 심각한 지적만큼 그에게 다시 답을 요구하는 것은 어차피 무리일 것이다. 고민만 안고 성경으로 들어가 보자. 요한복음 5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삼십팔 년 동안 누워서 지낸 병자를 만나는 사건이 기록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낫고자 하느냐고 물으신 후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신다. 이에 낫게 되었는데 그날이 유대인에게는 노동이 금지된 안식일이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어겼다고 하며 예수님을 비난했다. 이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 아버지 하나님이 이름으로 즐겁게 ‘노동’하신 사례 중의 하나다. 다시 말해 예수 그리스도의 수고로운 노동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치욕스러운 노동’에서 벗어나게 하는 유일한 길임을 ‘노동해방’의 실마리로 잡아야 할 것이다. 

예수님을 메시야로 받아들일 수 없는 세대와 인류는 이미 그 자체로 심판이며 무거운 짐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 예수의 진리를 거부하거나 혹은 모른 채 살아가는 세상도 이미 그대로 하나님의 무서운 심판과 진노 아래 있다. 하지만 그 세상이 금방 사라질 수 없는 이유가 있다. 바로 그 세상에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살아가신 것처럼 아직도 그리고 미래에도 하나님의 자녀로 살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 11:28)” 노동의 무게에서 벗어나는 것은 육신을 벗는 것이 제일 상책이다. 하지만 억지로 자살할 수는 없을 터라 주어진 삶에서 육체에 쏟아지는 짐은 ‘해석’하면서 ‘가치’를 두고 살아갈 때 ‘쉼터’가 생긴다. 물론 그 안식의 쉼터에 대해 예수님은 바로 자신이라고 분명하게 알려주신다. 솔로몬의 다음 고백은 인생을 즐기라는 말이 아니다. 먹고 마시며 수고하고 노동하고 낙을 누리는 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므로 하나님의 존재를 기억나게 하는 것이 지혜의 왕 솔로몬의 고백이었다. 거짓 안식과 참 안식, 육적 안일함과 영적 평안의 경계가 무엇인지, 왜 그 경계의 주관자는 주 예수 그리스도이어야 하는지, 왜 그분이 유일한 안식처인지 더 깊이 묵상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사람이 하나님의 주신 바 그 일평생에 먹고 마시며 해 아래서 수고하는 모든 수고 중에서 낙을 누리는 것이 선하고 아름다움을 내가 보았나니 이것이 그의 분복(分福)이로다(전 5:18).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세상을 제대로 알고 바르게 살아야
백성에게 공경과 충성의 마음을 깃들게 하려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