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쉰여섯.기독교 국가로서 칭기즈칸과 초기 몽골 제국
12세기 말 몽골 민족이 세계사의 주역으로 갑자기 등장할 때 그들의 종교는 민족의 고유한 민간 신앙을 지니고 있었다. 하늘과 땅은 우주적 사건의 흐름 속에서 종교적 의식처럼 하나로 연합해 있다고 보았다. 이들의 신앙에는 남성과 여성의 관계처럼 영혼이 인간과 동물을 조화롭게 만들며 움직이도록 하는 정령과 같은 존재이며, 만물의 죽음 후에도 그 영혼은 살아있다. 이러한 종교적 태도는 유목 생활을 하면서 세계의 가장 큰 무역로를 개척한 환경에서 많은 종교에 대해 더욱 개방적 관계로 유지되었다. 자신들의 신앙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모두 개방했다. 도교와 유교는 물론 이슬람과 불교 그리고 양성론 기독교도 몽골의 종교적 관심사가 되었다.
몽골인들이 기독교를 처음으로 접한 것은 1007년이다.(422) 그들은 4세기 로마 제국의 군인으로 종교적 박해를 받아 순교했다는 성인 세르기우스(St. Sergius) 신앙에 관심을 갖는다. 이유는 권력 확산을 꾀하던 몽골인들에게 대중적 지지를 얻으면서 군인들의 성인으로 숭배의 대상이 된 자가 세르기우스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세르기우스를 환상 중에 만난다. 당시 몽골 왕이 눈보라 속에서 길을 잃고 헤매다 환영 중에 세르기우스를 만나게 되었다는 전설이다. 이 사건으로 몽골은 기독교를 접하게 된다. 그 몽골 왕(Khan)은 몽골의 한 부족인 케레이트(Kerait)인으로 이른바 성자 세르기우스를 만난 것을 계기로 수많은 케레이트인들이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다. 그런가 하면 자신들에게 우호적이었던 양성론파 사제들과 자연스럽게 교류를 하게 된다. 당시 기독교 풍습들을 편리하게 자신들의 종교에 혼합하는 방식으로 십자가를 장식으로 즐겨 사용했다.
어떤 통치자들은 자신의 이름을 기독교식으로 개명하기도 했다. 그 가운데 가장 유명한 왕이 바로 몽골 제국의 창시자인 테무친(Temüjin, 1162년경-1227)이다. 이 테무친이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다른 이름을 갖게 되는데 그것이 바로 ‘칭기즈칸(Genghis Khan)’이다. ‘대양(大洋)의 통치자’ 곧 세계의 지배자라는 뜻을 가진 그 이름은 기독교로 개종한 케레이트 왕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당시 ‘칭기즈’는 그리스도인 케레이트 왕의 봉신이었으며, 그 왕의 조카딸이 바로 자신의 부인이 되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칭기즈는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왕으로 지중해부터 중국해까지 이르는 대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당시 중앙아시아의 기독교는 예수 그리스도가 신성과 인성 두 본성을 지녔다고 주장하는 양성론파 기독교가 대세였다.
이러한 몽골 제국의 기독교 교세 확장은 13세기에 이르러 내몽고 튀르크(Turkic)족의 경우 왕족을 포함하여 거의 모든 사람이 기독교인이 되었으며 그 전통을 100년 이상 유지하기도 했다. 역사가 맥클로흐는 칭기즈칸과 관련된 몽골의 기독교 확장을 이렇게 요약한다. “칭기즈의 주의 깊고 계획적인 그리스도인 케레이트 몽골 공주들과의 연맹의 결과, 여러 위대한 왕들(Khans)은 그리스도인 어머니를 갖게 되었다.”(423) 그 인물 중에 또한 대표적인 인물이 중국 원(元)나라 초대 황제가 되는 쿠빌라이칸(Kublai Khan)이다. 쿠빌라이칸의 통치 아래서는 당연히 양성론파가 중국의 중심 권력층이 되었다. 1368년 외국인혐오증에 분노한 명나라에 의해 몽골제국이 패망할 때까지 그야말로 기독교 제국의 영화를 누렸다. 제국의 번영과 영화와 함께 네스토리우스교는 당나라 태종과 그 이후에 누렸던 영화를 재현했다. 네스토리우스교는 국가 내의 단지 한 종파가 아니라 경제, 무역, 군사, 외교 면에서 다른 국가들과 몽골 제국의 다리 역할을 담당하면서 교세의 뿌리를 견고하게 내렸다. 그런가 하면 1258년 아바스 왕조를 침공하여 바그다드를 함락시킨 인물인 일-칸(Il-Khan) 훌라구(Hülagü)는 자신의 아내가 동방정교회 신도였기 때문에 그곳 사람들에 대해서는 다른 곳에서 저질렀던 학살을 자행하지 않았다. 그런가 하면 자신의 궁전 가운데 하나를 제공했으며 또한 그곳에 동방교회의 본부와 종합대성상도 건립해 주었다.(425)
이러한 몽골은 14세기 이후 몽골 제국이 붕괴하면서 동방 교회 중심의 기독교도 그 영향력을 상실한다. 이후 몽골에는 티베트 불교가 몇 세기 동안 우세한 종교로 자리 잡았다. 하지만 20세기 후반 특히 1990년대 몽골이 사회주의 체제에서 벗어나면서 다시 기독교 특히 이번에는 개신교가 확산하기 시작했으며 현재 종교적 자유와 외국의 선교 활동으로 그 규모는 점차로 증가하고 있다. 중세의 몽골이나 지금이나 진리를 빙자한 거짓 기독교도 득세하고 있다. 더욱 절대 진리 하나님의 말씀이 필요한 곳이 몽골이 되었다. 중세의 비성경적 요소가 지배적이었던 몽골의 기독교가 이제 성경 진리에 근거한 바른 말씀을 듣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가 되길 바란다. 오래전 사도 바울을 통해 아테네에서 그리스 잡신을 버리고 창조주 여호와 하나님을 믿도록 복음을 전파한 것처럼, 이제 한국의 올바른 기독교 신앙과 전통이 칭기즈칸의 후예들에게 더욱 전파되길 기도한다.
22 바울이 아레오바고 가운데 서서 말하되 아덴 사람들아 너희를 보니 범사에 종교성이 많도다 23 내가 두루 다니며 너희의 위하는 것들을 보다가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보았으니 그런즉 너희가 알지 못하고 위하는 그것을 내가 너희에게 알게 하리라 24 우주와 그 가운데 있는 만유를 지으신 신께서는 천지의 주재시니 손으로 지은 전에 계시지 아니하시고 25 또 무엇이 부족한 것처럼 사람의 손으로 섬김을 받으시는 것이 아니니 이는 만민에게 생명과 호흡과 만물을 친히 주시는 자이심이라 26 인류의 모든 족속을 한 혈통으로 만드사 온 땅에 거하게 하시고 저희의 연대를 정하시며 거주의 경계를 한하셨으니 27 이는 사람으로 하나님을 혹 더듬어 찾아 발견케 하려 하심이로되 그는 우리 각 사람에게서 멀리 떠나 계시지 아니하도다 28 우리가 그를 힘입어 살며 기동하며 있느니라 너희 시인 중에도 어떤 사람들의 말과 같이 우리가 그의 소생이라 하니 29 이와 같이 신의 소생이 되었은 즉 신을 금이나 은이나 돌에다 사람의 기술과 고안으로 새긴 것들과 같이 여길 것이 아니니라(행 17:22-29)
<250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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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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