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모순의 문화에 무감각한 학문의 저질성
정말 학문적 인간의 본질 속에는 (그것이 현재의 형태를 완전히 도외시하더라도) 진정한 모순이 있다.
소위 진리를 탐구한다는 학자의 본질은 진리 증명이 아니라 모순 남발이 그 정체다. 니체의 이 말에 담긴 의도를 서술하기 전에, 이 말은 일단 다르게 표현하면 유럽 지성사는 반지성사라고 할 수 있다. 진리 탐구라는 학문적 시도들과 관련된 온갖 발설들은 모순의 역사이며 혼돈의 문화를 야기한 것이다. 논리학에서 모순이란 동일한 대상에 대해 서로 정반대인 서술을 하는 것을 말한다. 가령 ‘니체는 철학자다’라는 명제에 대해 모순은 ‘적어도 어떤 경우에 니체는 철학자가 아니다’가 된다.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다’에 대해 모순은 ‘적어도 어떤 경우에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가 아니다’가 된다. 이 두 명제가 동시에 가능하다고 주장하면 모순이라고 한다.
학문적 활동에 이러한 모순의 법칙을 적용한다면, 위대한 학문적 탐구라고 극찬을 받는 저작은 그만큼 반드시 자기모순을 야기해야 한다. 어떤 저자의 확신을 담은 진리 주장은 자신의 말이 많아지는 만큼 거짓을 말한다는 고백이 된다. 이에 대한 통찰 없는 지적 탐구는 니체에게는 곧 허섭스레기에 불과하다. 그렇다고 해서 모순을 의식한다는 것을 단지 머리로만 이해할 수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말을 더할 때마다 이렇게 말하는 꼴이 된다. ‘이것은 진리입니다. 하지만 동시에 진리가 아닙니다!’ 이것은 입을 열지 말아야 하는 상황이다.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 이쯤에서 니체는 고대 그리스의 비극을 만나고 예술을 만나 돌파구를 찾고자 한다.
니체는 모순을 진지하게 의식하지 않는 천박한 지식인 사회가 되어가는 19세기 중엽의 독일 문화를 이렇게 규정한다. “이 모순, 즉 학문적 인간은 요즘 독일에서 마치 학문이 하나의 공장이며 단 일 분의 태만이라도 벌을 초래하리라는 초조에 빠졌다. 이제 그는 제4신분, 즉 노예 신분이 일하듯이 가혹하게 일한다. 그의 연구는 이미 더 이상 일이 아니고 고난이다.”(236) 온갖 자료를 총동원해 수십 권의 백과사전을 만들며 지식의 축적으로 학문이 발전한다고 보는 지식 사회에 대해 니체는 아무런 자기의식 없이 죽어라 일하는 노예와 같다고 말한다. 니체에 따르면, 진정한 지식 문화는 단순히 지식의 축적이나 표면적인 교양이 아니라, 인간의 내면적 깊이와 삶의 진정성을 발전시키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래서 니체는 슈트라우스와 같은 당대 대중적 지식인들을 속물적이라고 혹평을 쏟아낸다.
우리는 학자 신분이 야만의 방향으로 이미 무섭게 전진했음을 보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바로 이 책에서 저 불쾌한 휴식의 욕구를 발견하고, 또 철학과 문화와 무릇 실존의 모든 진지함 사이에서 어설픈 주의력으로 귀를 기울이는 저 타협을 발견하기 때문이다. (……) 일체의 현실적 경험과 인간에 대한 근원적 통찰의 결여로 우리를 놀라게 [한다-필자 주]”
학자가 야만인이 되는 것은 삶과 문화를 근본적으로 지배하는 모순의 법칙에 무감각하기 때문에 벌어지는 지적 사고다. 가령 니체가 “자유의 몸이 되었을 때조차 곤궁과 초조와 채찍을 맞는 꿈을 꾸는 노예처럼 그[학자-필자 주]는 꿈 속에서도 자기의 멍에를 던져버리지 않는다”(236)고 할 때 이는 지성이 아닌 반지성을 학문의 본질로 의식해야 한다는 뜻이다. 학자에게 모순은 극복 대상이 아니라 채찍을 맞아야 하는 노예의 운명과도 같다.
니체는 이렇게 모순의 법칙에 철저한 학자적 지성 위에 실존의 다양한 삶 곧 인간의 문화가 숨 쉴 수 있다고 한다. 모순은 질식의 논리가 아니라 생존의 한 가닥 희망이라고 설파한다. “만약 학문이 문화를 위해 시간을 내지 않는다면 학문은 도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 만약 학문이 문화로 이어지지 않는다면, 모든 학문은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며 무엇을 위함인가?(237-38) 학문이 모순의 문화를 경시할 때 속물 문화가 확산하며 가장 지독한 야만으로 자리 잡는다. 이러한 속물 문화를 대중이 감각 없이 마치 교양처럼 받아들인다면 이는 문화를 향유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 삶을 병들게 하는 독을 마시는 것이다.
속물 문화의 선두에 서서 그 시대의 정신을 정의하려고 하고 예술과 문학과 철학을 운운하며 온갖 잡스러운 지식들을 유포하는 지식인들의 속물 행태는 획일적 믿음을 강요하여 결국 극과 극의 모순이 활동하는 삶과 문화를 황폐하게 한다. 이러한 당대의 분위기를 니체는 이렇게 발설한다. “독일인 개개인이 본성적으로 신학적 종파의 추종자로서 자신만의 이상한 사적 신앙을 고안”(242)하고 있다고. 19세기 중엽 독일은 니체가 보기에 철학과 신학의 많은 논의들은 ‘신의 무덤’ 위에 쌓인 견딜 수 없는 악취가 풍기는 쓰레기 더미였다. 모순을 지식의 본질로 삼는다는 것, 이것은 니체가 온몸으로 수용하고자 하는 운명적 과제다.
니체의 학문의 본질에 대한 통찰은 그 전체 철학을 지배한다. 하지만 자기 삶 전체를 모순이 지배한다는 잔인한(?) 법칙을 어떻게 얼마나 견뎠는지 니체도 우리도 모른다. 니체가 그렇게 온몸으로 평생 극복해 보고자 했던 학자적 모순에 대해, 성경은 모순 극복의 문화가 이렇게 전개되고 있다는 실마리를 소개한다. 의미 있게 읽어 보자.
8 영광과 욕됨으로 말미암으며 악한 이름과 아름다운 이름으로 말미암으며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9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는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10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고후 6:8-10)
<253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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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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