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6-10-28 20:5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무조건적 용서’라는 허구


니체는 서양 기독교를 ‘양심의 가책’을 조작하고 그 죄 책임을 ‘신’만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조작한 무리라고 비판한다. 그들이 조작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신 스스로가 인간의 죄 때문에 자기를 희생한다. 신 스스로가 자신을 자기 자신에게 지불한다. 신이란 인간이 상환할 수 없게 된 것을 인간에게서 벗어나 상환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이다.”(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II 21: KSA 5, 331쪽) 이처럼 서양 기독교는 타인에게 피해를 입히는 행동으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에게 자기 위로와 위안을 주려고 만든 ‘천재적 장난질’이라고 한다. 타인에 대한 우연한 잘못을 신에 대한 범죄로 규정하고, 결코 인간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죄 책임’을 만들어 신이 자신에게 그 부채를 스스로 상환하는 방식으로 ‘무한한 신적 사랑’을 조작한 것이 서양 기독교다.
니체가 지적하는 기독교 비판은 인간의 종교적 사유를 감정과 욕구, 의지와 충동의 결과로 보려는 사유를 전제로 한다. 이른바 ‘신의 사랑’이나 ‘인간에 대한 무조건적 사랑’에 대한 이해도 인간이 스스로 자기 삶을 지탱하기 위한 전략으로 발생한 것으로 본다. 타인에게 고통을 받는 인간은 자신이 억울하게 당한 것에 대해 본능적으로 보상을 받고 싶어 한다. 한 대 맞으면 한 대 이상 때리고 싶고, 수치를 당했다면 반드시 몇 배로 보복하고 싶은 것이 본능이다. 이러한 본능을 니체는 ‘악한 것’ 혹은 ‘나쁜 것’으로 간주하지 않는다. 그래서 니체는 삶의 유지하는 전략으로 보상 내지 보복의 동기를 숨기거나 왜곡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다. ‘무조건적 용서’라는 말을 조작된 허구라고 혹독하게 비판한다. 무조건 용서한다고 말하지만 이미 내면에는 상대방을 자신 앞에 무릎 꿇게 했다는 보복과 보상 심리가 앞서간다.
그렇다면 타인의 잘못에 대해 용서할 필요가 없다는 말인가? 만약 용서라는 전략을 택하지 않는다면 자기 삶을 유지하는 데 더 큰 손실이 생기기 때문에 용서한다. 타인을 용서하지 않은 채 타인과 관계를 맺고 살아야 한다면, 이는 삶 자체가 보복을 위한 ‘준비 단계’에 불과하다. 복수를 준비하면서 사는 인간, 인간은 스스로 이것만을 목표로 설정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설령 평생을 무엇인가에 대한 응전과 보복을 위해 사는 인간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는 보복을 위해 다른 사람과 타협하며 협동하면서 주위 사람에게 신뢰를 주는 양면성을 가지고 있다. 그러한 관계 속에서 보복만이 아닌 도덕적 삶도 전략적으로 선택하며 생존한다.
그런데 도덕적 삶을 동경하는 순간, 내면에 발동한 보복 심리는 ‘악한 것’이 되고 복수를 조장했던 ‘원한감정’에 대해 스스로 ‘양심의 가책’을 느낀다. 그래서 양심의 가책은 인간에게 극히 인간적인 도덕적 실체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는 자기 보존의 욕구가 자리 잡고 있다. 타인에게 보복하지 않고 용서하는 행위는 탁월한 도덕적 양심의 실체가 있기 때문이 아니라 미래의 삶을 경영하기 위한 삶의 수단이다. 보복이 보복을 낳을 것이라는 두려움으로 피하고자 하는 마음도 있지만, 이것만으로는 미래를 바람직한 삶으로 보장받을 수 없다는  염려 때문이기도 하다. 미래를 견디고자 하는 생존의 의지 때문에 도덕적 양심에서 비롯한다는 타인에 대한 ‘무조건적 용서’가 나온다.
이러한 ‘용서’ 전략에 대해 니체는 심리적 사실 하나를 더 지적한다. “모욕하고 나중에 용서를 비는 것이 모욕당하고 용서해주는 것보다 훨씬 기분이 좋다.”(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48: KSA 2, 251쪽) 정말 인간적인 너무도 인간의 심리를 정확하게 간파한 지적으로 보인다. 전자가 후자와 다른 점은 전자에는 인간 생존의 근본 동력인 삶을 끌어가는 ‘힘’이 과시되는 반면에, 후자에는 수동적인 용서라는 힘의 축소와 섭섭함이 남는다. 용서의 내적 동기가 ‘순수하다’는 것이 얼마나 허구인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지적이다.
남을 자신의 원하는 만큼 벌 줄 수 있기 때문에 남을 용서해 줄 수 있다는 것이며, 남을 원하는 만큼 벌 줄 수 있기 때문에 나도 용서 받을 수 있는 ‘자격’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 용서할 수 있는 ‘도덕적 양심’이란 실체가 있기 때문에 용서하는 행위가 가능한 것은 아니다. 
니체는 여기서 우리에게 심각한 물음을 제기한다. 가령, 인류 사회에는 자신을 죽도록 미워하거나 혹은 자신의 자녀까지 죽인 자를 용서하는 그야말로 ‘무조건적인 순수한 용서’의 사례가 많이 있다. 니체는 지금 이러한 ‘인륜적 가치’의 모범을 근본적으로 문제 삼고 있다. 인류를 지배하는 고정된 ‘선 그 자체’라는 근본 가치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인류가 자기 생존을 위해 역사적으로 조작하여 관리하고 고착화시켰다는 것이 니체의 지적이다.
이러한 인간의 종교적 심리와 사유 전략의 체계에 대한 니체의 철저한 난도질은 심해지면 질수록 니체의 서양 기독교에서 말한 그리스도의 사랑은 전혀 우리 내면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선명하게 드러낸다. 니체의 이러한 통찰에도 불구하고 니체보다 앞서 성경은 인간 스스로의 어떠한 노력도 그리스도를 결코 만날 수 없음을 엄하게 지적하고 있다. 니체의 지적은 플라톤 철학에 의존한 기독교의 맹점과 서양 사상 본질에 대한 전면적 해체 전략이자, 더 이상 인간적 수단으로 기독교 진리에 접근할 수도, 해서도 안 되는 것을 자백하는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내게 있는 모든 것으로 구제하고 또 내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지라도 사랑이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자금이 자공에게 공자의 행적을 묻다
백성이 풍성한 덕을 느낄 수 있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