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삶의 무의미성 찬미, 니체의 예리한 착각
“행복이 있는 곳에는 거의 어디에나 무의미에 대한 기쁨이 있다고 할 수 있다.” (프리드리히 니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338: KSA 3, 567쪽.)
우리는 어떤 대상의 값어치와 의의(意義)가 없을 때 무의미하다고 한다. 어떤 지식이나 정보 혹은 물건이 더 이상 쓸모없을 때 그렇게 평가한다. 그런데 앞의 인용을 보면 니체는 무의미함을 대하는 태도에 대해 반전을 시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무의미함에 대해 기쁨이 될 수 있다고 하며, 이를 행복과 연관시킨다.
행복을 삶에서 누리는 만족과 기쁨으로 소박하게 정의하면, 인간이 느끼는 흐뭇한 감정 속에는 ‘무의미함에 대한 기쁨’이 함께 담겨 있다는 사실을 짐작하게 한다. 간단히 말하면 무의미함은 인간이 만들어 이미 충분히 사용하고 있는 기성품(旣成品)을 전제로 한다. 니체의 생각을 따라가 볼 때 어떤 것도 새롭다고 할 만한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모든 것은 이미 기성품으로 존재할 뿐이며 약간의 시간차일 뿐 곧 무의미함으로 추락할 신세다.
그렇다면 서구 사상에서 영원한 의미를 담고 있다고 여겼던 이념이나 사상 혹은 종교적 진리도 그 실체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된다. 유용하게 보이던 모든 것들을 우연적 가치로 간주해야 한다는 제안이다. 우연적 가치이므로 무의미함은 ‘의미 없다’는 말보다는 마음껏 사용하고 미련 없이 버리면 된다는 뜻으로도 볼 수 있다. 이러한 태도를 기쁨으로 여기는 곳에 행복이 가능하다는 것이 니체가 지적하려는 바다.
니체의 철학을 우리는 ‘허무주의의 철학’이라고 한다. 이 개념에 가장 가까이 있는 말이 ‘삶에 대한 무의미함’이라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주어진 삶이 본질적으로 그리고 궁극적으로 무의미한 것임을 지적하면서, 이러한 과정을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새로운 가치를 창조할 수는 가능성으로 돌려놓으려고 한다. 니체가 자신의 철학을 ‘다이너마이트 철학’이라고 말하는 것도 기존의 가치를 모두 부정하고 새로운 창조 가능성의 여지를 그만큼 폭넓게 열어놓으려는 것이다. 앞서 말한 무의미함에 대한 기쁨이라는 것도 새로운 의미를 창조할 수 있는 사고를 가능하게 하는 허무주의의 맥락(니체는 이것을 ‘긍정적 허무주의’라고 한다)에서 이해할 수 있다.
기존 가치에 대한 의도적 파괴를 동반하는 니체의 무의미화는 소극적인 패배주의 방식이 아니라 오히려 적극적으로 모든 것들을 무의미하게 만들고자 하는 삶의 방식이다. 이쯤이 되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는 의지나 모든 것을 무의미하게 하려는 의지나 그 차이는 없어진다. 니체는 이렇게 무의미화의 과정을 주어진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긍정하기 위한 중요한 계기로 삼으라고 한다.
창조와 무의미의 차이를 없애버리는 니체의 이러한 사유는 이원론을 사상의 뿌리를 가지고 있는 서구 문명에 대한 ‘해체’를 야기했다. 무의미화를 삶의 기쁨과 만족의 계기로 삼고자 할 때 가장 먼저 해체해야 하는 대상은 ‘영원한 진리’와 같은 가치들이다. 서구의 기독교적 가치들이 대표적인 파괴 대상들이 된다. 성경의 절대권위에 대한 전면적 부정은 물론이고 이제까지 축적해 온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모든 유용한 지식과 연구들에 대한 폐기도 뒤따른다.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명제는 단순한 구호로 끝나지 않았다. 유럽 전역에 걸쳐 마을 중심에 있던 교회들은 그야말로 하루아침에 죽은 신이 묻힌 ‘공동묘지’의 표지로 변해 버렸다. 이제 신자들은 땅속 공동묘지로 묻히기 전에 그곳에 가는 절차를 경험하기 위해 교회를 찾는다.
유한하고 유약한 인간이 절대적 존재자에 대한 의존 감정에 의해 종교를 요청하는 숫자가 존재한다고 해서 그것이 영원한 진리가 존재하는 증거는 될 수 없다. 신도(信徒) 수가 늘어난다는 것과 절대적 진리가 존재한다는 것은 결코 일치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신의 죽음이라는 현상에 감염당하는 수가 늘어날수록 신을 긍정하려는 자의 수는 더 많아질 수도 있다.
인간은 무의미함에 대한 기쁨을 원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영원한 진리, 불변의 존재, 인생의 최고 의미인 ‘신(神)’이 삶의 주인이 아니라 인간 자신이 삶의 주인이 되고자 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가능하려면 유일한 의미로 불리던 신이 죽어야 한다. 1900년 니체 죽음 이후 지금까지 유럽 기독교 문화는 이러한 니체의 저주가 진행 중이며, 이제 서구 기독교에 의존했던 한국 교회도 이미 시작된 ‘신 죽음’이 망령으로 떠돌고 있다.
동시에 우리는 세계 어떤 기독교 국가보다 성경 진리에 대한 갈증이 아직도 강하다. 성경을 하나님 말씀으로 깨닫고자 하는 자들이 여전히 많이 있다. 니체의 저주대로 신의 죽음이 보편화되는 현상이 확산할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성경적이지 않은 거짓 신의 존재도 허구로 드러날 것이다. 또한, 아직도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깨닫고자 하는 자들에게는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님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성경 진리가 더 귀한 값진 은총으로 남을 것이다.
무릇 하나님의 행하시는 것은 영원히 있을 것이라 더 할 수도 없고 덜 할 수도 없나니 하나님이 이같이 행하심은 사람으로 그 앞에서 경외하게 하려 하심인 줄을 내가 알았도다 (전 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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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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