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5-11-16 22:51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앎을 지극히 하기 위해서는 (2)


是以 大學始敎 必使學者卽凡天下之物 “그렇기 때문에 대학의 처음 가르침은 배우는 사
시이 대학시교 필사학자즉범천하지물 람들에게 모든 천하의 사물을 직접 대면하게 하고,“
莫不因其已知理而益窮之 “(그 사물이) 자기가 이미 알고 있던 이치를 따라
막불인기지지리이익궁지 서 더욱 궁리하게 하여,”
以求至乎其極 “그 (사물의) 궁극(최고의 가치)에 이르기를 구하
이구지호기극 도록 하였다(가르친다).”
至於用力之久 而一旦豁然貫通焉 “(그렇게 해서) 노력함이 오래되어 어느 날 아침
지어용력지구 이일단활연관통언 에 활연관통하게 되면”
則衆物之表裏精粗 無不到 “모든 사물의 겉과 속, 정밀함과 거칠음에 이르지
즉중물지표리정조 무불도 않는 곳이 없고,”
而吾心之全體大用 無不明矣 “내 마음의 전체와 큰 작용도 밝게 드러나지 않음
이오심지전체대용 무불명의 이 없게 된다.”
此謂物格 此謂知之至也 “이것을‘물격’이라 하고 이것을 앎의 지극함이라
차위물격 차위지지지야 하는 것이다”



본문과 관련해서는 무엇보다도 ‘활연관통’이라는 말을 먼저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활연’은 ‘뻥 뚫린 상태’를 뜻하고 관통은 ‘꿰뚫어 통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활연관통은 어떤 사물에 대해서 그것을 뻥 뚫고 훤히 꿰뚫어서 깨닫게 된 지극한 경지를 표현한다 하겠다.
이런 앎의 경지에 이르게 하기 위해서 대학은 처음 배우는 사람들에게 자신이 알고 있는 이치를 근거로 해서 직접 사물을 다룰 것을 가르치고 있다. 어떤 사물(이론이나 공식 등 포함)에 대해서 요리조리 다방면으로 궁리해 가면서 그 사물의 본성(극)에 도달하기를 충고하는 것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교육현장에서도 중요한 배움의 원리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노력을 오래도록 하다보면 자신이 궁리하고 있던 사물에 대하여 어느 날 하루아침에 뻥 뚫리고 꿰뚫게 되는 깨달음을 느끼게 되고야 말 것이다. 어떤 의미에서 유학의 활연관통의 경지는 불교에서 말하는 ‘득도’ 또는 ‘깨달음’(열반의 경지)과 같은 말이라 할 수 있다.
사람이 이 경지에 이르게 되면 모든 사물의 겉과 속, 그것의 정밀함과 조아함 등이 그에게 이르게(드러나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기 마음의 전체 상태와 그 쓰임이 명확하게 될 것이다. 이 상태를 일러 ‘물이 격(바르게)했다’라 하고 이 상태를 일러 ‘앎의 지극함’이라 하는 것이다.
활연관통의 앎은 유학에서 단순히 성현의 지식을 머리로만 암기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넘어서 사물의 본질에까지 이르고, 다시 그 앎이 실생활에서도 자신의 마음의 구조와 그 씀씀이에서까지 환히 드러나야 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활연관통’은 유학자들의 지식추구의 최고의 경지요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군자가 유학을 공부한 후 관리가 되어 기존의 알고 있는 암기수준의 지식만을 활용해서는 안 되고 인간 사회에서의 삶과 자연의 삶에도 간극이 없이 적용이 되는 자연스러운 생활실천의 경지까지 요구되는 것이다. 즉 활연관통의 경지(불교의 득도의 경지를 포함)는 단순히 지식을 추구하는 수준을 넘어서서 만물과 인생 자체를 꿰뚫고 자연스럽게 그 자체로 우리의 전 생활 영역에 관통하는 그런 수준의 앎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기독교인은 성경을 지식으로만 알고 삶 속에서도 알고 있는 지식에 근거하여 율법적인 수준으로 살아가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은 성경이 말하는 앎의 체계를 분명히 알되 이 앎을 자연스럽게 생활에까지 적용해가는 삶의 적용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에서 인간의 깨우침이나 지혜 등과 관련되는 모든 사태는 성령이시다. 그분은 가르치고 생각나게 한다(요14:26). 또한 성령은 보혜사(요15:26)요, 진리의 영이다(요16:13). 그래서 성령의 깨우쳐주심은 온전하다. 진정으로 진리의 영이신 성령의 깨우침을 받은 자는 성경의 내용과 현실에서의 삶을 다 같이 자연스럽게 자신의 삶 속에 적용도 하고 응용도 할 수 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인과 물을 긷는 일이나 그녀의 결혼과 관계된 개인 사정을 물으면서도 한편으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신학을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 그 한 예이다.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고전2:15). 그렇다. 세상에서 최고의 가치인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알고 믿는 판단을 내린 자는 그 무엇으로도 판단받을 수 없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세상의 어떤 일에 대해서도 바른 깨달음을 바탕으로 얼마든지 다른 일들을 판단해 갈 수 있다.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있는 자 그는 진정 최고의 깨우심을 얻은 자일 수밖에 없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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