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처해 있는 상황에서 평안함을 맛보아야
穆穆文王 於緝熙敬止 깊고 고원 하도다 문왕이여! 줄곧 빛나시고 공경함에 머무셨네.
목목문왕 오집희경지
爲人君 止於仁, 사람의 임금이 되어서는 어짐에 머무셨고,
위인군 지어인
爲人臣 止於敬, 사람의 신하가 되어서는 공경함에 머무셨고,
위인신 지어경
爲人子 止於孝, 사람의 자식이 되어서는 효에 머무셨으며,
위인자 지어효
爲人父 止於慈, 사람의 부모가 되어서는 자애함에 머무셨고,
위인부 지어자
與國人交 止於信。 나라 안의 백성들과 교제할 때에는 미더움에 머무셨네.
여국인교 지어신
(대학 전문2장에서 발췌)
본문은 대학의 전문 3장에 실려 있는 내용이다. 본문의 출전은 시경의 문왕편이다. 문왕은 중국 유학사에서 회자되는 성인 중에 한 사람이나 실존의 인물이기보다는 전설적인 인물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문왕은 은나라를 정복하고 주나라를 세운 무왕의 아버지다. 공자는 문왕을 꿈에서라도 보고 싶어 했다(논어 술이, “吾不復夢見周公”:오불부몽견주공).
‘목목’은 심원하다는 뜻이다. 깊고 그윽한 인품을 소유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오’는 본래는 어조사 ‘어’다. 여기서는 감탄사로 쓰이고 있어서 오로 읽어야 한다. 집은 길쌈 같은 것을 계속 지어가듯이 계속되는 것을 뜻하고 희는 밝히 빛남이다. ‘경’은 공경한 모습이고 ‘지’는 그침이나 머물러 있음을 의미한다. 이 시는 결국 문왕은 그의 깊고 그윽한 인품을 계속 유지하며 그 모습으로 빛나며 그런데도 공경한 모습으로 늘 한결같다는 것을 예찬하고 있다.
‘목목’과 ‘집희경지’의 내용이 그 다음으로 이어진다. 문왕은 나라의 왕이 되었을 때에는 늘 인자함을 보였고, 신하로 왕을 섬길 때에는 공경함으로 머물러 있었다. 자식이 되어서는 부모에게 효로 섬기기를 편해 하였고, 부모가 되어서는 자녀에게 늘 자상하고 자애로웠으며, 나라 안의 백성들과 사귈 때에는 언제나 믿음을 주는 사람으로 머물러 있었다.
‘경지’는 “공경하며 머물러 있었다”로 해석하든 “머물러 있기를 공경하였다”로 해석하든 큰 차이가 없다. 경지의 진정한 뜻은 문왕이 어떤 상황에 처해 있든 그 상황을 공손하게 편안해 했다는 것이다. 왕이 되는 것이나 부모가 되는 것이나 자녀가 되는 것이나, 나라 안의 사람들 곧 나 이외의 다른 사람들과 사귀는 일들이 모두 간단치 않은 일들이다. 그리고 문왕이 아니라도 사람이라면 그 누구도 이런 인생길을 가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본문은 피할 수 없는 인생의 길에서 사람은 누구나 늘 멈춤 없이 광채를 빛내며 공경함을 지니고 이 삶의 순간마다 그대로 머물면서 평안함을 누려야함을 강조하고 있다고 결론지을 수 있다.
그렇다면 기독인의 ‘경지’(敬止)는 어떠한 것이어야 할까.
바울 사도는 두 가지의 경지를 우리 기독인에게 일깨우고 있다. 하나는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에서 누가 나를 구원하랴”(롬7:19)이다. 또 다른 하나는 “우리가 알거니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의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롬8:28)라는 말씀이다.
기독인은 살아 있는 한, 즉 육신의 몸을 지니고 있는 한 죄를 범할 수밖에 없는 괴로움의 삶 그 자체이다. 기독인의 삶은 하나님의 은혜를 따라 하나님의 자녀로 살고자 하는 마음과 육신의 정욕이 원하는 바를 따라 살다가 율법의 정죄를 받게 되는 삶의 과정에 있는 것이다. 은혜와 죄로 이어지는 인생길에서 그대로 머물면서 이 안에서 공손하며 그대로 머물러 있을 줄 알아야 한다. 기독인은 이 삶의 현실에서 늘 고통스러워하면서 바른 길에 서고자 해야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교리에 따를 때 사람은 몸을 지니고 있는 한 율법에 지배되기 마련이다. 율법은 십계명을 기본으로 해서 인간의 발달만큼이나 다양하게 사회적으로도 퍼져 있다. 율법은 보다 넓은 의미에서는 세상의 일체의 성문법과 불문법, 그리고 관습법 등을 포함한 일체의 규례들까지도 포함한다고 보아도 무리가 아니다. 인생은 몸을 지니고 육체의 욕심을 따라 살아가는 한 이 모든 법아래 놓여 있다. 그런데 이렇게 율법을 따라 살아가는 인생의 종착지는 모두 영원한 죽음일 뿐이다. 이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모든 인생은 사망의 몸과 사망의 세상에서 참 삶을 추구하려 고민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삶을 공손하게 그 상황에 머물면서 평안해 할 수 있어야 한다.
성경에서 인생이 생명의 삶을 살 수 있는 길은 예수를 믿고 하나님의 죄 용서의 은혜를 받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이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을 통하여 그 분만이 주실 수 있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만 주어진다. 그런 사람은 하나님을 사랑한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 곧 하나님의 뜻 안에서 부르심을 입은 그 사람은 그가 무엇을 하든지 모두 협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신다. 이것이 기독인이 머물러 있어야 하는 두 번째 경지라는 것이다.
기독인이 생명과 죽음의 세계를 넘나들며 온갖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 수많은 죄를 범한다 하더라도 마침내 예수 그리스도를 참으로 믿을 때 그 모든 일들이 다 함께 선을 이루게 된다는 이 두 진리의 경지 안에 머물면서 평안을 누려야 할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독인은 이 곤고한 세계에서 생명과 사망의 줄타기를 두려움 없이 수행해야 한다. 이 세계를 즐겨야 한다. 동시에 곤고한 세계와 선이 이루어지는 세계가 서로 구별되는 세계가 아니기에 지금 우리의 삶 속에서 고통 속에서도 선이 이루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모든 인생이 각각 어려운 삶의 세계를 피할 수 없고 그 속에서 한없이 초라해져만 가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 보통일 것이다. 하지만 이 모든 삶의 순간순간을 종합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믿고 이 삶의 세계 안에서 편안함을 누리는 우리 모두이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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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교육학 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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