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니체의 순진한 ‘세계’:신 없어서 더 좋은 세계
‘오, 행복이며! 오, 행복이며! 오, 나의 영혼이여, 노래하고 싶은가? (……) 노래하지 마라! 조용히! 세계는 완전하다.’ 자신의 책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다섯 번째의 복음서’라고 말했던 독일 철학자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의 말이다. 신의 죽음과 더불어 ‘천국’의 붕괴를 유럽에 고지(告知)했던 니체의 의도는 신이 없는 세계에서 자유롭게 살아갈 수 있는 영혼의 안식처를 제시하고자 한다. 나아가 영혼의 거처인 이 세상 대지(大地)는 살 만한 ‘완전한 세계’임을 구상했다.
유럽 정신사에서 ‘개인’의 등장은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그러므로 존재한다’는 명제에서 시작 한다. 시기적으로 17세기 이후의 산물이며, 그 배경에는 중세의 종교관으로부터 벗어난다는 혁명적인 발상이 담겨 있다. 중세의 교권주의 나아가 신지배의 세계관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새로운 주체를 만들어낸다. 바로 ‘인간’이라는 주권자이다. 이성(理性, reason)이라는 영원불변의 능력을 가진 인간 혹은 자아(自我)라는 주체는 모든 사건과 사물의 존재 유무를 결정하는 기준이 된다. 나아가 신마저도 추론의 산물로 보고 신을 상상할 줄 아는 인간의 사고력을 더욱 높이 찬양하게 된다.
그런데 니체가 볼 때 이러한 근대사상의 저변에는 삶의 주권자로서 개인(자아)의 능력을 발휘하기에는 충분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바로 ‘신’ 혹은 ‘인간의 영혼’과 같은 불변의 존재에 대한 구상(構想)은 인간의 자유로운 사고를 방해한다고 보았다. 자기 능력의 탁월함을 찬양하는 근대 이성은 너무나 부도덕하고 이기적이다. 근대 이성은 너무나 자기중심적이고 이질성에 대해서 너무나 무자비했다. 실제로 근대에서 현대로 이어지는 수백 년 동안 ‘유럽의 이성’은 자신과 다른 이성(理性), 동양의 문화에 대해 전례 없는 무시와 폭거를 자행하기도 했다. 제1,2차 세계대전을 겪으면서 이러한 서양 이성에 대한 ‘종말’은 당연한 요청이기도 했다.
이쯤에서 근대의 이성을 포기해야한다는 자기 반성이 일어나고, 이 와중에 사람들은 근대의 이성을 본질적으로 비판했던 니체를 재조명하게 되었다. ‘신의 죽음’이라는 명제로 대변되는 니체에게 이성은 ‘자유로운 정신 그 자체’이어야 한다. 또한 주어진 세계에서 최고의 자기만족을 누리면서 매순간 창조력의 의지를 드높일 수 있는 존재이어야 한다. 그래서 가장 이질적인 요소도 삶의 필수적인 동력으로 삼을 줄 아는 자, 그런 자가 진정으로 자유로운 개인이라고 보았다. 그러면서 니체는 이 세상의 터전인 ‘대지(大地)’를 그 자체로 생명이 약동하는 곳이며, 좋은 것과 나쁜 것이 서로 공존하면서 극단적인 가치들이 서로 긴장과 갈등, 대립과 투쟁의 양 상을 띠고 운동하는, 유한하지만 ‘완전한’ 세계라고 주장한다.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절대적 존재인 신의 죽음으로 대체된 자리에 들어선 근대 이성의 오만함을 비판한다. 불변의 권좌를 잡고 오만한 만행을 일삼았던 서양 근대의 이성은 진정한 자아의 성취가 아니라 자기 몰락을 스스로 초래했다고 지적한다. 근대 이성을 넘어서는 니체의 자유는, 한 예를 든다면, 극단적 사유 혹은 사유의 극단을 무한히 열어놓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니체의 말, ‘나는 사기꾼들을 경계하지 않는다. 나는 조심하지 않아야 한다. 나의 운명은 그걸 원한다’(『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 4부, ‘마술사’ 중)는 말은 자유로운 정신은 극단을 넘나드는 사유를 할 수 있는 자임을 보여준다.
니체는 이러한 자를 ‘자유로운 정신’이라고 보며, 그러한 생의 의지를 철저하게 의식하면서 사는 자에게는 이 유한한 세상이 그 자체로 정당한 세계가 될 수 있다. 니체는 세계의 정당성(正當性)을 거론함으로써 인간의 자유로운 정신은 자기 자신의 유불리(有不利)를 넘어서는 차원임을 강조하려고 한다. 신이 없는 세계 그래서 유한한 세계, 대립과 갈등, 모순과 긴장이 지배하며 개인의 유불리를 떠나 자유로운 생명들이 약동하는 세계, 이러한 선악을 넘어서는 세계를 찬양하라고 한다. 수많은 독설과 폭언, 살기서린 인간들의 아우성을 보면서, 니체는 오히려 신이 없는 이러한 세계가 얼마나 만족스럽고 살만한 곳인지 들어보라고 한다. ‘조용히! 세계 는 완전하다.’
유한한 세계를 살만한 세계로 보거나 그렇게 받아들이고자 하는 것은 니체뿐 아니라 많은 인간들의 일반적 속성이기도 하다. 니체의 특별한 구상은 아니다. 그러나 이 세상을 니체처럼 살만한 세계로 여기고자 하는 태도는 애처로운 동감을 유발할지는 모르지만, 그것은 단지 세상을 지으시고 운행하시며 장차 심판하실 하나님을 애써 잊어버리거나 떨쳐버리고자 하는 무용(無用)한 몸부림이며 속임수에 불과하다.
3 너희는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한다. 마지막 때에 조롱하는 자들이 와서 자신들의 정욕대로 행하고 조롱하며, 4 말하기를“그가 재림하신다는 약속이 어디 있느냐? 조상들이 잠든 이후로 만물이 처음 창조될 때와 같이 이렇게 그대로 있다.”할 것이다. 5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하늘이 옛적부터 있었고 땅은 물에서 나와 물로 형성된 것과, 6 그때 세상은 물이 넘쳐서 물로 망하였다는 것을 일부러 잊으려 한다. 7 그러나 지금의 하늘과 땅은 불사르기 위해 동일한 말씀으로 간수되어 경건하지 않은 자들의 심판과 멸망의 날까지 보존된 것이다.(바른성경, 벧후 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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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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