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사신(死神) 시대의 신(神): ‘몸부림치는’ 몸
“그리스 비극의 죽음과 더불어 엄청난 공허가 밀려왔고, 공허는 도처에서 통절하게 느껴졌다. (……) 이제 ‘비극은 죽었다.’”(GT; KSA1, 75. 재인용: 정낙림, “예술 생리학과 미래 예술”, 『니체연구』 제28집, 2015년 가을, 190. *이하 원문인용도 같은 글에서 재인용함) ‘신의 죽음’을 말하기 20여 년 전, 니체는 ‘그리스 비극의 죽음’을 말한 바 있다. 이 말은 박사 학위도 없는 25세 청년 니체가 리츨 교수의 추천으로 스위스 바젤대학 고전문헌학 교수로 임용된 후 자신의 철학적 통찰을 모아 저술한 처녀작 『음악 정신으로부터 비극의 탄생』에 나오는 말이다. 니체 사상 전체의 흐름을 따라가면서 ‘비극의 죽음’과 ‘신의 죽음’을 서로 엮어 보면, ‘고대 그리스 비극이 죽었기 때문에 유대-기독교 신학(神學)이 살 수 있었고, 그러한 신학을 죽여야 비극이 다시 소생하여 인간의 ‘몸’이 다시 부활할 수 있다’는 정도로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소크라테스(주전 5세기) 이전 시대의 그리스 예술은 음악과 무용 예술을 중심으로 ‘비극’ 상연이 지배하고 있었다. 회화나 조각 혹은 건축 예술이 시각적 연출 방식에 초점을 두는 것과 비교하면, 비극은 합창과 무용을 통해 펼쳐지는 비극을 온몸으로 느끼며 몰입하는 것이 성격상 다르다고 할 수 있다. 니체는 질서 잡힌 시각적 충동에 역점을 두는 예술을 ‘아폴론적 예술’이라고 하며, 청각적 충동에 몰입해 가는 예술을 ‘디오니소스적 예술’이라고 한다.
그런데 비극을 통해 드러내고자 했던 예술 장르로서 고대 그리스 비극은 삶을 지배하는 본질적 요소가 모순과 비극이라는 전제를 하고 있다. 모순과 갈등, 대립과 투쟁 나아가 고통과 몰락의 불가항력적 운명이 비극을 지배했다. 비극 상연에서 합창단은 통상의 연출 방식과는 다르게 의도적으로 앞으로 배치했다. 왜냐하면, 합창단은 단지 극의 줄거리를 전달하는 조연이 아니라, 비극이라는 삶의 본질을 시민들에게 생생하게 전달하는 효과를 극대화하려고 했기 때문이다.
모순과 불합리한 삶을 비극을 통해 시민과 합창단이 함께 절규하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무질서와 오류투성이인 삶을 질서정연하게 (회화나 조각으로) 표현하거나 펼쳐 보이거나 서술할 수 없다는 주장을 강하게 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무질서를 ‘악’으로 규정하고 비극을 혐오하면서 삶은 언어를 통해 분명하게 개념화해야 한다고 주장한 위인(偉人)이 있다. 바로 소크라테스(Socrates, 주전 470~399년)다. 니체는 합창이 아닌 각본(脚本)을 중심으로 이끌어가는 소크라테스 방식의 예술을 “살인적인 원칙”(GT; KSA1, 87.)이라고 비판한다. 니체가 볼 때 독특한 화법(변증법적 대화의 기술)으로 사람들의 불합리함과 무지함을 폭로하면서 개념의 의미를 선명하게 규정하여 ‘논리적 진리’에 도달한다고 가르쳤던 소크라테스는 유럽 정신의 원천을 매몰한 자, 고대 문명의 파괴자요 살해자다.
개념을 사용하여 진리를 단정 짓는 방식으로 매우 다양하고 복잡한 삶을 ‘참/거짓’으로 평가하는 행위는 니체에게 삶에 대한 의지를 부정하고 억압하는 만행이다. 무질서와 혼동을 실존적 삶을 이루는 필수요소로 여기지 않고 오히려 없어져야 할 ‘악한 것’으로 규정한다. 그리고 그러한 삶 너머에 ‘참인 세계’가 존재한다고 꾸며 현재를 부정적으로 보도록 ‘최면’을 건다. 개념 사용을 통한 이념 수립이 삶을 부정하는 최면술이 되는 이유는 다양한 특성들을 모두 배제하고 공통된 특성 몇 가지를 모아 마치 진리인 것처럼 유포하기 때문이다.
‘사랑’, ‘구원’, ‘평등’ 등과 같은 개념들은 얼핏 분명한 뜻을 가진 고상한 개념처럼 보이지만 니체 눈에는 그럴듯한 개념의 날조에 지나지 않는다. 현실을 떠난 그러한 상황이 어딘가에 따로 존재한다는 것은 여기 지금 이러한 삶을 부정하게 하는 퇴폐적인 태도의 산물이다. 이렇게 보면 분명한 개념과 철저한 논리로 무장하는 관념의 상아탑은 현실을 그대로 인정하지 못한 나약하고 비굴한 자들의 패배의식과 한탄, 증오심이 그 저변에 자리잡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니체는 이렇게 조작된 관념의 구조와 이를 뒷받침하는 논리와 논증이 삶을 긍정하지 못하는 퇴폐주의로 몰아간다는 폭로를 통해 2천 년 이상의 유럽 지성사의 근본 토양을 갈아엎는다.
그리고 니체는 현재와 현실, 그중에서도 자신의 신체, ‘몸의 부활’을 통해 삶을 그대로 인정하는 삶의 태도를 강조한다. “우리는 인간의 몸이 어떻게 가능하게 되었는지 한없이 놀라워할 수 있다. (……) 이 각각의 생명체가 독립적이며 동시에 예속되어 있고, 그러면서도 어떤 의미에서는 다시 명령하고 자신의 의지에 따라 행위 하면서 전체로서 살고 성장하고 한순간 동안 존립할 수 있는지!”(N; KSA11, 576f(37/4)) 니체가 말하는 몸(Leib)이란 개념은 엄격히 말하면 추상개념이 아니라 늘 현재의 나를 창조하는 동명사로서 ‘몸부림’이다.
니체에게 예술은 신체인 자기 몸을 스스로 ‘부리는 행위’다. 가축이나 타인에게 일을 시키듯이 자기 스스로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마음대로 조종하면서 현실에 최적인 자신을 만들어가는 행위다. ‘힘에의 의지’에 동력을 받은 ‘몸의 부림’은 온몸으로 부딪히면서 고뇌와 고통의 비극을 긍정하려는 애씀의 진행형이다. 이와 같은 ‘몸의 부림’을 통해 “자기 자신을 조형하는 자”(N;KSA12, 89(2/66))가 니체가 말하는 진정한 예술가다. 인간의 몸부림이 일어나는 신체가 바로 창조의 근원이며 원천이라는 말이다.
모든 창조의 원천과 능력이 바로 인간의 신체임을 확증하려는 니체의 실험은 더욱 치밀하게 진행되고 있다. 니체의 예고대로 ‘신의 죽음’ 곧 절대적 진리의 소멸로 현대 문화는 ‘자기 몸의 돌봄’이라는 ‘몸부림’ 현상으로 몰입하고 있다. 생명의 비밀은 오직 창조주에게 달려있다는 말은 점점 짜증 나는 말이 되고 있다. 지상파 방송과 수많은 종합편성 채널들이 앞 다투어 송출하는 건강 비법(?)과 보양식, 건강식 등의 정보가 창조주에게 모았던 두 손을 ‘리모컨’에 모이게 하고 있다.
12 모든 것이 내게 허용되더라도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다. 모든 것이 내게 허용되더라도 나는 어떤 것으로도 제재를 받지 않을 것이다. 13 음식은 배를 위하여 있고, 배는 음식을 위하여 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것도 저것도 다 없애 버리실 것이다. 몸은 음행을 위하여 있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위하여 있으며, 주께서는 몸을 위하여 계신다(바른성경/고전 6: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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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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