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종교 타락과 테러리즘
해체주의 철학자 자크 데리다(Jacques De-rrida, 1930~2004)는 작금에 일어나는 온갖 테러는 서방이 양성하고 훈련시켜 온 면이 있다고 지적한다.?지오반나 보라도리 지음, 『테러 시대의 철학』, 김은주 외 옮김, 서울: 문학과 지성사, 2006, 211쪽.
그런데 그가 서방이라고 할 때 어떤 특정 국가를 지목하는 것은 아니다. 이해관계가 얽히고설킨 서방 국가들의 긴장과 갈등, 공조와 대립이라는 서양의 복잡한 상황이 테러의 확산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이러한 이해는 테러리즘에 대한 엄격한 책임을 추궁할 때도 마찬가지다. 아랍권 혹은 이슬람 일반을 테러와 연관시킬 수는 없다. 테러리즘과 중동의 역학관계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동 국가들의 ‘동질성’에 대한 선입견은 우선 배제해야 한다. 테러리즘에 대한 원인을 중동 국가로 시선을 돌리기 전에 우선 그 국가들이 처한 심각한 ‘이질성’을 직시해야 한다. 자살 폭탄과 같은 자기 파괴적인 행동을 자행하는 행위의 이면에는 여러 중동국가들의 뭉쳐진 힘이 아닌 ‘차이’와 ‘분열’ 그리고 ‘대립’과 ‘갈등’이라는 각국의 이해관계가 살벌하게 도사리고 있다.
이렇게 보면 이질성이 지배하는 현대 국제 사회의 결코 풀 수 없는 갈등과 대립이 테러리즘을 점점 격화시키고 있다고 진단할 수도 있다. 미국과 서방, 유럽과 나토, 러시아와 미국, 미국과 중국 등등 국가 관계 설정 자체가 ‘차이’와 ‘분열’을 규정하는 고유명사처럼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 국가 혹은 정치 사회적 ‘관계’를 지칭하는 어의(語義)는 테러리즘의 관점에서 보면 더 큰 갈등과 폭력을 몰고 올 잠재적 위협을 반영하거나 예고한다. 국가 간의 관계가 공조 무드를 조성하거나 호조(好調)를 보이는 것은 이미 설정한 ‘범죄 국가’에 대해 강한 대응과 공격을 위한 연대를 강화하는 것으로 진단할 수 있다. 국제 사회를 장악하고 있는 강대국들의 연대는 이에 맞서기 위해 더욱 극단적인 전략을 선택할 수밖에 없는 결단을 자극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진영의 대립 논리를 설정할 때 각각의 주장에 대한 당위성을 쉽게 ‘절대화’하는 수단이 있다. 바로 ‘종교’다. 성경에 손을 얹거나 코란을 품고 자기 행동을 신의 이름으로 정당화한다. 이 의식(儀式)을 통과하면 어떤 비인간적 만행이라고 하더라도 스스로는 무한히 정당화된다. 현대 사회에서 지역 분쟁와 테러리즘의 진원지로 지목하는 곳, 팔레스타인은 정치와 종교가 분리되지 않는 곳이다. 모든 무력(武力) 행사는 신 앞에 올린 제사 행위의 절차로 간주된다.
미국 주도의 국제적 연대에 맞서는 반미 동맹은 자신의 정치적 행위를 위해 더욱 확고한 종교적 명분을 내세울 수밖에 없다. 이는 전지구적 규모의 전쟁을 치른다고 하더라도 신 앞에서 수행하는 성전(聖戰)은 살아남은 전사(戰士)들에게는 언제나 다음에 전개할 전쟁의 준비단계일 뿐이다. 왜냐하면 신 앞에서 수행하는 전투는 자신이 부름 받은 사명의 확증이며, 그렇기 때문에 삶의 의미는 항상 죽음을 잉태하고 있다는 ‘자멸의 면역 체계’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거대한 자본으로 첨단 장비로 중무장하여 점점 세계적 위협으로 커지고 있는 테러리즘은, 이스라엘이나 미국과 무관하지 않는 한, 항상 성전(聖戰)을 성격을 띨 것이 분명하다. 왜냐하면 이 두 나라는 그 기원이 같은 신 여호와에 대한 신앙의 토대 위에서 세워진 나라로 규정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나라들에 대해서 그리고 이 두 나라의 동맹관계에 대해서 적대감을 가진 세력들의 테러는 무력 투쟁이자 동시에 ‘신들의 전쟁’의 성격을 띤다.
현대 사회에서 우리의 일상에 너무나 가까이 다가온 테러리즘은 흔하게 보이는 종교적 코드와 유사하다. 곳곳에 어지럽게 널려있는 거짓 종교의 허섭스레기들이 즐비하다. 그 쓰레기 더미 속에는 무서운 테러리즘의 숙주가 자라고 있다. 왜냐하면 건전하고 순수한 종교가 세속화되어 더러운 이익의 수단으로 전락하는 만큼, 그 곳에서는 바로 또 다른 신의 이름으로 추악한 탐욕을 채우려는 무서운 테러리즘이 자라기 때문이다.
샘이 그 물을 솟구쳐 내는 것처럼, 그것이 자기의 악을 드러내니, 폭력과 파괴의 소리가 그 안에서 들리며, 질병과 살상이 내 앞에서 계속된다.(바른성경/ 렘 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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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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