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존재의 진리’라는 허구를 만드는 사기꾼: 양심
하이데거가 사용하는 개념인 ‘현존재(現存在, Dasein)’는 인간이다. 이 개념은 인간의 본질과 관련되며, 인간이 탐구하는 본질은 ‘존재’다. 탐구한다는 말을 더 정확히 말하면 존재가 인간을 통해서 의미 있는 것으로 드러난다는 뜻이다. 다시 말해 궁극적 존재의 의미를 현존재가 파악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현존재와 더불어 드러나는 존재의 의미를 아는 것이 진리가 된다. 이렇게 보면 진리는 현존재가 존립해야 하는 목적이기도 하다.
인간을 굳이 ‘현존재’라고 부르는 이유도 존재 의미가 시간과 공간과 형상의 구체성을 띠고 드러나기 때문이다. 구체성을 띤다는 말은 존재의 궁극적 의미가 무엇인지 인간을 통해 비로소 확정된다는 말이기도 하다. 신과 같은 궁극적 존재는 초월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현재 구체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현존재와 더불어 드러난다.
그런데 현존재는 존재의미가 드러날 때 단지 기계적 수동성만 갖지는 않는다. 내면화한 존재 의미를 현존재는 자발적 사유를 통해 그 의미를 찾아낸다. 그 결과 진리 인식이 가능하다. 이렇게 보면 진리란 오직 현존재인 인간을 통해서만 드러난다. 존재 의미의 확실성은 현존재가 진리를 인식할 수밖에 없는 필연성이 된다. 현존재로 존립한다는 것은 오직 존재의 진리를 파악한다는 뜻으로만 의미가 있다. 신과 같은 궁극적 존재가 있다는 말은 오직 현존재인 인간이 반드시 그 존재의 확실성을 입증할 수 있다는 말이 된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존재 이유와 그 위대함을 궁극적 존재를 파악할 수 있다는 가능성에서 찾는다. 더 나아가 하이데거는 신과 인간의 경계를 없애버리려고 한다. 이는 곧 신과 인간의 분리도 아니고 동시에 일치도 아닌 방식이 된다. 중요한 것은, 중세 자연신학처럼, 신의 속성과 능력이 드러날 때 인간과 자연이 결코 배제당할 수 없다는 점이다. 특히 인간의 언어 행위를 통해 세계와 인간은 본질적 관련을 맺으면서 궁극적 존재의 의미를 드러낸다. 인간의 언어적 해석을 통해서만 세계도 의미 있고 (신과 같은 근원적) 존재도 의미를 갖게 된다.
현존재가 인식한 진리를 통해서만 궁극적 존재가 드러난다는 사실을 하이데거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존재는 진리가 있는 한 ‘있다.’ 그리고 진리는 현존재가 있는 동안만 있다. 존재와 진리는 동일한 근원을 갖는다.”('존재와 시간' 독일어 원전 230쪽) 즉 현존재에게는 존재의 의미가 이미 담겨있고, 현존재는 그 의미를 해석하고, 그 결과 진리를 확보한다. 그렇다면 인간이 진리를 추구한다는 말은 ‘존재’란 항상 있을 수밖에 없는 영원한 진리라는 말을 이미 전제하고 있다. 이렇게 되면 현존재로서 인간은 영원한 존재 진리의 소유자가 된다.
사실 인간이 영원한 진리를 소유한다는 말은 그렇게 새삼스러운 말은 아니다. 서양철학사에서 흔한 명제일 수도 있다. 그런데 하이데거가 중요한 이유는, 신과 같은 궁극적 존재나 영원한 진리가 사라진 현대사회에서,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인간의 사유와 더불어 ‘궁극적 존재’가 있을 수밖에 없다는 필연성을 제시했다는 점이다. 현존재인 인간이 영원한 진리의 담지가 된다는 것이 선택이 아닌 필연적인 사건이라는 점이다. 이런 뜻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인 현존재를 “존재이해를 갖고 있는 (……) 탁월한 존재자”('존재와 시간' 독일어 원전 222쪽)라고 말한다.
그런데 이러한 현존재에는 근원적 힘이 들어있다. ‘양심의 소리’다. 이 양심의 소리는 현존재로 하여금 스스로 존재의 의미를 분명하게 담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며, 그렇게 스스로를 결정하도록 하는 힘이다. 하지만 양심이 현존재를 부르는 소리는 거의 침묵에 가깝게 들린다고 한다. 하이데거가 신비롭게 들리는 듯한 이런 말을 하는 의도는 궁극적 존재의 의미가 현존재에게 분명히 보이고 있으며 그것을 잃어버리지 말고 보존하라는 의미다.
양심의 소리를 달리 표현하면 자기기준의 선악을 결단하라는 내적 촉구하고 할 수 있다. 이 결단은 현존재를 자신의 본래 존재로 돌아가게 하는 힘이다. 선악 판단의 근거가 양심의 소리라고 함으로써 진리와 거짓에 대한 확신은 그만큼 강화될 수밖에 없다. 현존재에 존재의미가 담겨있고 또한 그러한 존재의미가 드러날 수 있도록 하는 동력(動力)이 바로 양심이다.
이렇게 보면 양심은 인간이 존재를 순수하게 탐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의 확신이다. 어떠한 신학적 전제 없이도 궁극적 존재를 향한 인간의 탐구가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는 확신을 보장해 준다. 그러한 확신을 보장해 주는 것이 바로 양심이다. 양심의 소리는 궁극적 존재를 내면에서 찾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를 진리의 열정으로 착각하게 하는 속임수다.
양심은 인간 기준의 선악판단을 하게 되는 원천이다. 여호와 하나님만이 입법자가 되시고 재판장이 되신다는 진리를 본성적으로 거부하게 한다. 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간은 죄인이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양심은 존재의 궁극적 진리를 알 수 있는 근거라고 한다. 이 양심에 호소함으로써 존재의 진리를 탐구하라고 한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장애물이다. 이들에게 선악의 입법자와 재판장이 되려는 본성은 정죄 받아 바땅한 ‘죄성’이라는 말은 정말로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하이데거가 부활시키려고 했던 그리스-로마 시대로 대표되는 서양인의 본성에 대해 바울 사도를 통한 그리스도의 경고는 더욱 분명하게 들린다.
14 율법이 없는 이방인이 본성으로 율법의 일을 행할 때에는 이들은 율법이 없어도 자기가 자기에게 율법이 된다. 15 이런 사람들은 그들의 양심이 증언하여 그들의 생각들이 서로 고발하기도 하고 변명하기도 하여 자기의 마음에 기록되어 있는 율법의 행위를 보여 준다.(롬 2:14~15, '바른성경')
<다음 호에는 ‘논리학과 진리의 관계에 나타난 허구’을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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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서양 논리학에 나타난 허구로서 ‘진리’ |
언어로 만들어어진 가장 큰 속임수: 존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