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10-04-02 13:34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니체의 후손, 마르틴 하이데거


독일 현대철학자 마르틴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년 5월 26일∼1976년 9월 26일)가 죽자 프랑스 일간지 ‘르 몽드’지는 ‘우리 시대의 가장 위대한 사상가’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런가 하면 조국 독일의 유명 일간지 ‘프랑크푸르트 알게마니네 차이퉁’지는 “이 사람 마르틴 하이데거 안에 세계 철학사의 모든 지혜가 집결되어 있다”는 기사를 내 보냈다. 극히 서양 중심적 평가라는 기분이 들기는 하지만, 철학(philosophical)적 지혜(sophia)와 관련해서 최고수에 속한 사상가임에는 분명하다.

하지만 사후 10년이 지날 무렵 빅토르 파리아스가 1987년 ‘하이데거와 나치’를 프랑스에게 출판하자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자들은 경악과 충격에 휩싸인다. 그 책은 하이데거가 철저한 나치당의 추종자였다고 주장했기 때문이다.

그는 1933년 4월 21일부터 1934년 4월 23일까지 독일 남부에 있는 프라이부르크 대학 총장으로 재임했다. 이 시기는 독재자 히틀러와 나치즘(독일 국가 사회주의)이 지배하던 시기였다. 히틀러의 나치당은 게르만 민족의 우월성을 맹신했으며, 독일민족 중심의 ‘제3제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하이데거는 당시 공개적으로 나치즘에 대한 동조와 찬사를 보내기도 한다. 결국 나치당과 결별하지만, 1945년 프랑스 연합 점령군에 의해 전범과 관련되었다는 책임을 물어 하이데거는 교수직에서 해직되기도 했다. 이와 같이 하이데거는 서양의 지혜를 한 몸에 담고 있는 보고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지만, 인면수심의 흉악함을 보인 게르만 족의 만행과도 깊게 연루된 오명도 가지고 있다.   
 
그는 1889년 9월 26일 독일 바덴 주 작은 마을 메스키르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그 동네 마르틴 성당의 성당지기였으며 어머니는 평범한 농부 집안 출신이었다. 봉급이 워낙 적어 아버지는 술 창고를 지키는 일도 겸해서 생계를 꾸려갔다. 자라면서 총명함이 더해지는 아들 하이데거였지만 공부시킬만한 형편이 되지 못했다. 그런데 다행스럽게도 그 본당 주임 신부가 장학금을 주선해서 중등학교(김나지움)에 진학한다. 하지만 조건이 있었다. 장학금을 받는 대신 졸업 후 가톨릭 신부가 되기 위한 수업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예수회 수련생이 되지만 14일 동안만 기거했고 건강상의 이유로 포기한다. 그리고 일반 신부가 되기 위해 고향 프라이부르크 대학으로 진학해서 신학 공부를 하지만 이 역시 건강 때문에 그만두고, 그때부터 자유롭게(?) 철학에 전념한다.

그후 하이데거는 아리스토텔레스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중세 철학자 둔스 스코투스에 관한 연구로 교수 임용 자격 논문도 통과되어 교수가 되어 철학자로서 쓰고 가르쳤다.

은퇴하기 전 강의 후반기는 하이데거 자신만큼 어려운 철학자인 니체의 사상에 대해 많은 해설 강의를 했다. 
은퇴 후에는 단지 정해진 사람들과 제한된 만남을 가졌으며 20여 년 동안 저술에 몰두했다.

그런데 하이데거는 20년 또는 30년 동안 어떤 원고들은 발표하지 않고 놓아두었다. 출판사를 찾지 못해서 그런 것은 결코 아니다. 이유는 자신의 원고를 이해할 만한 시간이 가까워 올 때까지 기다리기 위해서였다. 마치 니체 자신이 세상에 너무 일찍 왔다고 했던 것처럼, 하이데거는 당시보다 너무 앞서가는 자신의 생각들을 시기적절하게 보여주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여러 면에서 아니, 근본적인 문제에서는 하이데거가 니체의 후손임을 보여주는 면들이 많다. 이는 니체가 위대하다는 말이 아니라, 니체가 말한 ‘신의 죽음’ 이후 어떻게 계속해서 신은 더 철저하고도 처참하게 난도질당하고 유기(遺棄)되는지를 생각해 보려는 것이다. 나아가 이것이 여호와 하나님의 섭리로 볼 때 어떤 평가를 내려야 하는지 고민해 보자는 것이다.

하이데거는 자신이 속한 유럽문화에 대해 근본적인 불만을 가지고 있었다. 다시 말해 자율성과 생동감이 충일했던 유럽 문화의 자유로움이 점점 사라지고 있다는 불만이다. 그리고 그 황폐화를 야기한 주요 원인이 서양 기독교에 있다고 보았다.

1920년대 후반부터 하이데거는 기독교에서 역사를 이끌어갈 수 있는 어떤 힘도 신뢰하거나 인정하지 않는다. 주변에 적지 않은 가톨릭의 예수회 신부들, 개신교 신학도들이 있었으며 그들과 두터운 우정을 쌓기도 했다. 그래서 얼핏 보기에 하이데거는 종교적인 사람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철학에는 서양 기독교에 대한 실망과 거부가 들어있다. 자신의 철학을 수립하기 위해 어쨌든 서양 기독교는 근본적으로 비판해야 할 대상이었음에 틀림없다.

‘신의 죽음’ 이후 유럽은 인간에서부터 다시 출발하려는 사상적 운동이 일어났다. 그 운동의 대표자가 바로 마르틴 하이데거다. 유럽 정신이 위기에 처했다는 하이데거의 시대 진단은 신이 죽었다는 니체의 말을 달리 표현한 것이다. 나치의 만행으로 피비린내가 나는 유럽의 한 가운데서 인간 존재의 바탕을 다시 긍정해보려는 자가 그다. 온갖 정욕대로 내버려지고 버림받은 마음 그대로 내던져진(롬1:14, 28) 심판의 현장에서 하이데거는 인간의 기초를 다시 마련하고자 ‘기초존재론’이라는 자신의 철학을 구상한다.

〈다음호에는 “신의 죽음과 하이데거의 ‘기초 존재론’”에 대해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신의 죽음’과 ‘기초존재론’의 허구
창조행위로서 글쓰기: 신이 되고픈 몸부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