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서양 논리학에 나타난 허구로서 ‘진리’
하이데거 철학의 핵심 개념은 현존재(Dasein, 現存在)다. 현존재란 시간성을 본성으로 가지고 있는 인간을 지칭한다. 시간적 특성과 관련된다는 말은 시간 이해가 인간의 본질을 이해하는 데 핵심이라는 뜻이다. 통상적으로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라는 틀로서 이해되는 시간은 하이데거에게 무엇보다도 중요하다. 인간의 고유함을 뜻하는 ‘사유(Denken, 思惟)’라는 행위는 곧 그때그때마다 주어진 시간이 결정해 주는 것을 따라간다는 말과 같다.
그런데 해당 시간에 충실하다는 것은 바로 말하는 행위(reden)과 관련된다. 말하는 것은 다른 사람을 포함한 주변의 세계와 소통하고 교감하는 행위다. 자신을 포함한 세계와 관계 맺는 행위로서 말하는 행위는 시간성에 종속되면서 동시에 자신에게 필요한 진리를 확정하는 사건이 된다. 이것을 도와주는 학문이 바로 논리학이다. 말하는 행위를 통해 인간의 존재여부가 결정된다고 생각하는 하이데거는 자신이 주장하는 논리학을 전통 논리학과는 달리 ‘철학하는 논리학(philosophierende Ligik)’이라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인간을 정의할 때 ‘말할 수 있는 생명체’라고 했다. 여기서 ‘말한다는 것’은 ‘로고스’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비록 그 후대에 그렇게 불렀지만) 그리스 사람들에게 논리학을 뜻하는 ‘Logik’의 어원이 바로 말한다는 의미인 ‘로고스’다. 로고스는 그 이후 서양 정신 역사에서 생각하면서 살아가야 하는 인간의 본질과 직결된 개념이 되었다. 언어를 제대로 사용하는 규칙 즉 문법은 동시에 인간으로서 제대로 살아가고 있느냐를 판가름하는 기준이 된다.
말하는 행위는 현존재인 인간이 자신의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관계를 맺는 가장 탁월한 행위다. 왜냐하면 이러한 과정에서 바로 ‘진리’가 드러나기 때문이다. 단순한 언어적 상징들이 난무하는 것이 아니라 참과 거짓을 분명하게 제시하는 명제들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진리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이렇게 볼 때 현존재의 존립을 결정하는 ‘시간성’은 지속적으로 진리를 말하게 하는 동력이 된다.
주어진 시간 틀에서만 인간의 고유한 행동인 말하는 행위가 일어난다. 이 과정에서 세계에 대한 상세한 규정이 일어남으로써 참인 진리가 부각된다. 그리스어로 진리는 ‘알레테이아(aletheia)’인데, 뜻은 ‘숨겨지지 않고 드러난다’는 말이다. 즉 시간의 흐름 속에서 일어나는 인간의 사유가 진리의 원천이라는 말이다.
진리는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언어적 행위의 필연적 결과다. 인간은 진리를 위해서 태어났고 그렇게 살아간다. 하이데거는 인간의 언어적 행위와 그 규칙인 논리학을 통해서 인간의 사유가 진리의 유일한 통로이며 원천임을 입증하려고 한다. 얼핏 보면 언어는 허구와 오류투성이지만 본래의 언어 활동으로 나가면 인간은 진리를 드러낼 수밖에 없는 필연성을 가지고 있다.
그런데 이 경우 진리의 필연성은 단지 명제가 참이기 때문에 비로서 가능한 것은 아니다. 이전에 이미 전체를 의미하는 세계에 대해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한다. 이러한 정황에서 진리라는 명제가 규정될 수 있다. 단지 말하고 쓰기 위한 기술이나 사용의 유용함을 위해 논리학을 공부하는 게 아니다. 하이데거는 이제까지 대학에서 가르쳤던 논리학이 본래의 목적을 망각한 것이라고 비판한다. 논리학은 가르쳐도 되고 가르치지 않아도 되는 선택과목이 아니다.
인간의 생각하는 행위가 가장 고유한 활동이고, 그 활동은 오직 언어의 규칙을 따라서 형성되기 때문에, 논리학은 철학적 사유의 운명을 좌우한다. 나아가 인간으로서 살아있음을 반성할 수 있는 유일한 활동이다. 언어 행위를 통해서 진리가 규정되고 규정된 진리가 다시 거짓으로 판명된다. 이러한 과정은 이미 진리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하이데거에 따르면 시간의 흐름 속에서 그때마다 언어를 사용해서 진리를 말한다는 것은 삶과 죽음의 문제와 직결된다. 그렇다면인간은 진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도록 결정되어 있고 진리의 주인이 된다.
과연 그러한가? 진리 탐구가 확실하며 진리추구를 운명으로 삼고 살아가는 것에 대해, 성령께서는 사도 야고보를 통해 말하는 행위에 대해 다음과 같이 엄한 심판을 내리고 있다.
5 혀는 작은 지체로되 큰 것을 자랑하도다. 보라 어떻게 작은 불이 어떻게 많은 나무를 태우는가? 6 혀는 곧 불이요 불의의 세계라, 혀는 우리 지체 중에서 온 몸을 더럽히고 생의 바퀴를 불사르나니 그 사르는 것이 지옥 불에서 나느니라. 8 혀는 능히 길들일 사람이 없나니 쉬지 아니하는 악이요 죽이는 독이 가득한 것이라.(약3:5~6/ 바른성경)
<다음 호에는 ‘언어의 상대성에 나타난 허구성’을 다루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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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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