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예수교장로회연합회 교회동역자협회  

학술

 
작성일 : 09-08-25 18:12  기사 출력하기 글쓴이에게 메일보내기
 

욕망의 동성애인가, 절제의 우정인가(1)


삶에 의미를 부여하던 가치들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시대, 니체를 따라서 우리는 이러한 시대를 허무주의라고 규정한다. 특정한 공간과 시간을 초월해 불멸의 가치로 존재하던 것들이 더 이상 어떤 의미도 가질 수 없는 시대 분위기를 일컫는 말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절대적 가치들은 본래부터 존재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이와 함께 니체가 더 밝혀준 것은 삶을 이끌어가던 ‘하나님’, ‘자아’, ‘이상국가’와 같은 말들이 타인을 교묘하게 지배하기 위한 억압장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니체의 허무주의에 근거해서 역사상 존재했던 모든 진리와 지식들을 타인 지배의 장치로 보려는 철학자가 바로 미셸 푸코다. 간단히 말하자면 권력은 반드시 진리라는 이름으로 다가서고, 순수한 진리라는 것도 타인에 대한 배척과 지배, 억압과 탄압의 앞잡이에 불과하다. 그런데 니체와 푸코가 주목받는 더 중요한 이유는 이러한 권력과 진리의 불가피한 착종(錯綜)을 허무주의의 시대를 창조적으로 극복할 수 있는 단서로 삼았다는 데 있다.
 
모든 것이 무의미함으로 끝장나 버린다는 것도 참기 힘들지만, 어느 정도 쓸모 있게 보이는 모든 문화적 행태들도 나를 억압하고 탄압하는 올무라는 것은 더 견디기 힘들다. 니체의 뒤를 따라 푸코는 이러한 상황을 철저하고도 정직하게 받아들인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을 야기할 수밖에 없는 ‘권력의지’를 허무주의 시대에 삶을 가능하게 하는 원천으로 본다.
 
푸코가 볼 때 권력은 반드시 진리를 동반한다. 이 경우 권력은 선과 악을 초월한 인간 삶의 원동력이며, 진리는 말 그대로 인간에게 참다운 것으로 보이는 것들이다. 문제는 참다운 것들이 이제까지 인간과 분리되어 객관적으로 존재하는 것으로 강요되었다는 점이다. 하지만 푸코는 진리를 내면에서 찾을 수 있는 삶의 생존 조건으로 본다. 삶의 생존 가능성은 자기 삶을 존속하고자 하는 의지 곧 권력의지가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푸코는 인간 내면의 권력의지는 곧 진리에의 의지라는 등식을 만든다. 간단히 말하면 진리에 대한 의지는 인간 내면에서 자기 삶을 스스로 가능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그렇다면 권력의지란 바로 지식 창조를 통한 자기생존의 원동력의 의미를 갖는다. 푸코는 이 예를 고대 그리스의 ‘동성애’에서 찾는다. 
 
(지난 제4호에서 보았듯이) 그리스 사회에서 성에 대한 관심은 특권층에 제한되었다. 성인 지배층이면서도 자유인인 남성만 특별히 누릴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당시 아내로서 여성의 존재는 단지 재산 관리인 내지 자녀 생산의 도구적 가치에만 한정되었다. 여성은 성(sex)의 대상은 맞지만, 성적 쾌락의 대상은 아니었다. 쾌락은 10대 소년들을 통한 동성끼리의 관계 즉 ‘남색’을 통해서 이루어졌다. 여기서 푸코가 주목하려는 것은 성적  자을 통해 고대 그리스인들이 어떻게 자기보존을 추구했는가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삶을 보존하고 자신을 정립해 간다는 관점에서 성적 쾌락을 이해한다. (이러한 성적 쾌락은 결국 기독교가 전래됨으로써 죄악의 온상으로 간주된다.) 그들은 사적 기쁨과 더불어 쾌락의 과도함도 스스로 경계하려고 했다. 하지만 이들은 쾌락을 부정적으로는 파악하지 않았으며 도덕적 관념으로 억압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인간의 본질로 이해했으며 인격을 형성하는 데 가장 중요한 절차로 여겼고 그래서 의학적으로 철저한 관심을 보이기도 했다. 요약하건대 동성애를 통한 고대 그리스인들의 성적 쾌락은 개인의 인격을 구성하고 평가하는 가장 핵심적인 생존 수단이었다.
 
여기에서 푸코가 보여주려는 것은 허무주의 시대에 가능한 인격형성의 단초가 아직도 우리 내면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이다. 허무주의 시대라고 해서 퇴폐적인 염세주의로 흘러갈 수 없다는 몸부림이다. 부도덕하게 보이고 충분히 비난거리가 되는 고대의 동성애를 통해 허무주의 시대에서 삶의 가치를 창조할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하고자 한다. 
 
우리가 허무주의 시대에 던져진 기독교인이라면 자기 존재의 가능성을 자신의 내면에서 결코 찾을 수 없다는 점을 다시 한번 떠올릴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귀한 종교적 진리마저도 식상한 관습이 되어 버렸고 신앙인의 고귀함도 의식하지 못한 채 정체 불분명한 유령으로 떠돌아다니기 십상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많이 반복하는 ‘예수는 그리스도이다’는 대명제마저도 스스로 공허한 것으로 치부하기 일쑤다.
푸코의 몸부림이 애처롭게 보인다면 기독교 진리를 남발하는 천박한 내 모습을 우선 질타해야 할 것이다.

<다음 호에는 ‘동성애와 우정’의 문제를 다루고자 합니다.>

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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