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화형(火刑)과 참수(斬首)의 공포: 테러리즘의 도미노 오류
IS 무장단체가 잔혹한 살상을 연일 자행하고 있다. 일본 기독교단 덴엔쵸후교회 교인으로 분쟁 지역의 여자들과 아이들의 참상을 알려온 종군 기자 고토 겐지(後藤健二, 47) 씨를 참수(斬首)했다. 그리고 억류해 오던 요르단 조종사를 산 채로 불에 태웠으며 그 동영상을 공식 웹사이트에 올렸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운운하기에는 너무나 비참하고 침울하다. 어쩌면 더 예상되는 무서운 공포는 이러한 잔혹 행위에 떨고 있을 세계 시민을 향해 미국과 서방 세력에 맞선 자신들의 성전(聖戰, Jihad)은 반드시 그 목표를 이루고 말 것이라는 독기와 결기 서린 태도일지 모른다. 그렇게 세계 시민 수십억이 대중 매체를 통해 함께 충격을 받고 오열하고 비참해지는 것은 이제 시작에 불과하다는 경고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몰려오는 불안과 공포에는 또 다른 이유가 있다. IS의 공격 목표는 비교적 분명한 데 반대로 그들의 정체는 정확하게 알 수 없는 데서 생기는 두려움 때문이다. 다음 테러에 대한 경고 메시지는 분명한데 언제 어디서 어떻게 일어날지 커지는 것은 ‘불확실성’뿐이다. 하지만 그것은 체계적으로 준비된 테러로 등장하여 자신들의 목적을 세계인들에게 분명하게 각인시킨다.
그런데 이러한 불확실성의 테러리즘은 다음 단계에서 테러리즘의 확산을 억제하려는 사회 내에 부정적 영향을 미친다. 테러를 경험한 사회는 테러에 대한 과도한 조치를 취할 것이며 사회 보호라는 이름으로 그 사회를 더욱 경직시킬 우려가 있다. 검문과 검색, 통제와 검열, 구금과 뒷조사 등을 통해 통제하게 된다. 그런데 이 또한 테러리즘이 계산하고 있는 전략임을 어렵지 않게 알 수 있다.
나아가 이러한 불확실성을 생존 전략과 방식으로 삼는 테러리즘의 전술에 대해, ‘발본색원’의 실체를 설정하고 막강한 군사력을 쏟아붓는 것은 자칫 비효율적 낭비로 흘러 오히려 테러리즘의 자연스러운 확장을 불러올 수도 있다. 몇 가지 정보로 테러리즘의 확산을 차단하는 듯한 매체 보도는 실전 경험 없이 아는 척하는 ‘게임 전략가’ 수준에 머물 수 있다. 이 또한 테러리즘이 계산한 다음 활동을 위한 빌미일 수도 있다. 불확실한 상태로 활동하는 실체 없는 테러리즘이지만, 항상 전 세계를 경악시킬 수 있을 준비된 공포일 수도 있다.
세계와의 교류 방식을 연속적인 테러 준비로 무장하는 이슬람 테러리즘의 논리는 신념의 절대화와 방법론의 다양화라는 전략과 전술로 나타난다. 이들에게는 권력과 종교를 절대 분리하지 않으며 종교의 이름으로 다른 이념에 대한 배타와 억압과 강요는 마땅하고 정당한 종교 행위가 된다. 학살과 화형, 고문과 참수, 인신매매와 성폭행, 소년병 동원과 자살폭탄테러, 이 개념들은 IS의 근본주의 또는 극단주의와 관련된 개념으로 현재 세계 언론을 장식하는 서술어들이다. 만약 이슬람의 법(샤리아, sharia)과 이러한 서술어가 상호관련성을 가지고 있다면, 현재 확산하는 앞의 사건 술어들은 불확실성을 통해 자신들의 교리를 절대화하려는 시도의 분명한 징후들일 것이다.
어떤 곳이든 현재 무슬림의 인구 증가는 더욱 가속화할 것이다. 평균 여섯을 낳는 다산 모(多産 母)의 증가는 동시에 이슬람 문화의 확대로 이어질 것이다. 작금의 동향으로 볼 때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라는 점을 강조하는 많은 신도들의 간절함과는 무관하게 무슬림 근본주의 혹은 극단주의의 확대도 동시에 증가할 것으로 짐작된다. 이슬람 교리에 나타난 ‘평화의 집’ 구축이 그 반대편 ‘전쟁의 집’을 위한 희생의 제물을 더 이상 요구하지 않길 바랄 뿐일터…….
이러한 두 세계의 구도를 니체가 말하는 ‘권력의지’의 구조에 넣으면, 평화와 전쟁은 교차하고 혼동되며 모든 것을 허용하는 것이 정당화된다. 평화를 위한 전쟁인지 전쟁을 위한 평화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 없는 정황에 빠져 들어간다. IS 무장단체가 거듭 자행한 충격과 경악은 구분할 수 없는 극단의 것들이 억지 융합되어 결코 해체할 수 없는 시한폭탄을 만들어 낸 결과로 보인다.
현대 사상은 복잡성과 다양성을 근본 특성으로 한다. 어느 것 하나를 절대화하지 말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느 것 하나라도 절대화에 대한 권력의지를 보이지 않는 것이 없다는 것이 생물의 조건이다. 이러한 인식은 한 세기 현대를 위해 ‘미래 철학에 대한 서곡’을 썼던 허무주의 역사철학자 니체의 예견이었다.
현대 사상의 심각한 혼돈은 악의 실체도 동시에 선의 실체도 없다는 사실에서 시작된다. 가치관의 붕괴에 따른 생활세계의 혼란을 예언한 니체의 진단으로 보건대, 점점 현실화할 가치붕괴는 신뢰와 위선, 호혜와 배신의 혼동이라는 양상을 띨 것이다. 이렇게 그 무엇도 분별할 수 없는 상황은 바로 정의의 칼과 보복의 칼이 교차하면서 만들어 내는 테러리즘의 악순환 구조를 조성하게 될 것이다.
도대체 선과 악, 진리와 거짓, 정의와 불의의 어떤 구분도 도저히 할 수 없는 시대, 그리고 생겨난 일체의 것은 반드시 파멸당하고 또 파멸당해야 한다는 엄격한 전제를 안고 살아가는 이 허무주의 시대에, 영원히 살아계셔서 자신의 창세전 영원한 작정 섭리를 보여주시는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간절한 기도가 뒤따를 뿐이다. ‘도대체 무엇을 세우시고 무엇을 헐어버리시려고 하시나이까?’ ‘세워져야 할 것이 세워지고 파멸해야 할 것이 파멸당하는 시간을 볼 수 있는 지혜 주옵시기를 원합니다.’
그(천사)가 힘찬 음성으로 외쳐 말하기를 “무너졌다. 무너졌다. 큰 바빌론이여. 이 성은 악령들의 처소와 온갖 더러운 영의 소굴과 더럽고 혐오스러운 온갖 새들의 소굴이 되었다.”(바른성경/ 계 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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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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