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세계화가 키우고 있는 괴물: 테러리즘
성경신학적 관점에서 본 니체 이후의 현대철학 〈100〉
지난 2월 15일 이슬람 극단주의 수니파 무장단체 이슬람국가(IS)는 만행을 저질렀다. 리비아의 트리폴리에서 이집트 콥트기독교도 21명을 참수하였으며 그 동영상을 전 세계에 방영했다. 그러면서 자신들의 행위는 무슬림 여성들이 콥트기독교도들로부터 받은 박해에 대한 정당한 복수라고 한다. 그리고 이러한 충격을 안겨다 줄 다음 목표는 ‘로마 정복’이라고 예고까지 했다. 전 세계로 방영되고 있는 이슬람국가의 잔인한 폭력은 이제 다음 희생자를 당연히 예고하게 만들고 있다.
현존하는 서양 철학의 거두(巨頭) 하버마스(Jurgen Habermas, 1929~)의 『의사소통 행위이론』에 따르면, 대화와 소통을 이끌어가는 원동력은 ‘자율적 판단력’과 ‘자유로운 행위’다. 그리고 이러한 행위의 전제 조건이 또 있다. ‘상호이해’이며 상호이해는 다시 ‘진리에 입각한 타당한 논증’을 전제로 한다. 조건이 충분해야 한다는 것은 당위일 수도 있지만, 그 조건이 얼마큼일 때 충분하다고 말할 수 있는지는 사실상 모호하다. ‘모호하다’는 말은 분명한 기준을 정하기가 어렵다는 뜻이다.
다음과 같은 가정(假定)의 문장이 있다. ‘테러리스트가 절대악의 상징이라면, 그에 대한 어떠한 공격도 정당한 행위가 된다.’ 이 가정문에서 보듯이 이 문장은 어떤 분명한 주장을 담고 있다. 하지만 첫 번째 조건문은 단순한 가정일 뿐이지, ‘테러리스트는 절대악이다’라는 분명한 명제의 형식을 갖추고 있지는 않다. 즉 참인 명제로서 건전한 논증을 위한 근거 역할을 할 수는 없다. 단지 조건을 만드는 행위에는 희망과 소망을 담을 뿐이다. 조건이나 가정을 무수히 만들어 내는 것은 인간의 무한한 자유일 수 있으며 어떤 제약도 없다. 하지만 참과 거짓의 분명한 판정이 불가능한 많은 가정들이 성급한 행동을 요구하는 이유 내지 근거 노릇을 한다는 데 위험성이 도사리고 있다.
군사력의 혁혁한 차이를 보이고 있는 현대 국가에는 이러한 가정의 논리가 단순한 논리가 아니라 실제임을 보여준다. 3천여 명 사망자, 6천3백여 명 부상자를 낸 9.11테러에서 보듯이 힘의 불균형은 언제나 극단적이고 무서운 결과를 예고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하버마스가 간절히 원하는 우정(friendship)과 환대(hospitality) 속에 세계질서를 유지하고자 하는 국가 간의 자유로운 의사소통의 환경 설정은 인류가 바라는 전제 조건치고는 너무나 비현실적인 가정(假定)이 되어가는 듯하다.
전 지구를 위협하는 테러들, 곧 특정 지역 나아가 전 세계를 목표로 하는 자살 특공대의 만행과 내전에 관여하는 게릴라전 등은 논증이 필요 없는 상황을 만들어 놓고 있다. 특히 지금도 첨단화되어 엄청난 속도로 무제한의 정보를 방출하는 지구촌 네트워크는 심사숙고하면서 진지한 의사소통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도무지 허락하지 않는다. 서방 강대국이 주도적으로 개발했던 정보통신 기술은 이제 엄청난 규모로 자신을 옭아매는 결과를 초래했으며 앞으로 그 피해는 점점 자신들에게 되돌아갈 염려와 위협을 자아내고 있다. 세계 시민의 자격으로 지구의 공공적 영역에서 평화 정착을 위한 충분한 토론을 하자고 제안하면서 자신들이 개발하는 기술의 위험성을 심사숙고할 여유는 점점 사라지고 있는 실정이다.
테러리즘은 최첨단 과학기술과 정보통신 기술을 발전시키는 강대국들의 틈 사이사이에서 언제라도 발생할 위험성을 안고 있다. 그것도 대화와 타협을 통한 국제적 평화 질서를 만들어보자는 그럴듯한 주장과 함께 경제적 이권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강대국의 패권주의 속에 더 강한 테러의 규모를 만들고 있는지도 모른다.
니체 철학의 전제는 ‘권력에 대한 의지’라는 것이다. 그런데 권력에 대한 의지는 만족의 끝이 없는 의지이며 무한히 반복하며 전 인류에게 점점 확산된다는 것이 중요한 특징이다. 테러리즘의 반복은 권력의지가 상호신뢰와 상호소통의 의지를 압도하는 방식의 순환과 반복의 필연성을 반영한다. 이미 오래전 홉스(Thomas Hobbes,1588~ 1679)가 말한 인간의 자연상태 즉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 상태’는 세계화를 밀어붙이는 강대국의 강요와 폭압으로 의사소통의 가능성 상실과 함께 테러리즘의 반복 속도와 규모를 그만큼 더 빨라지게 할 수도 있다. 경제적 이익 챙기기라는 목적과 전략이 지배하는 세계화 시대에서 이미 가장 무섭고도 실제적인 위협이 되어버린 테러리즘, 이 괴물은 결코 길들여질 수 없는 짐승으로 아주 가까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다.
욥기 38장 이후에 보면 하나님께서는 모진 고난을 견디며 친구들의 잘못된 신지식을 온몸으로 항변한 욥에게 아주 모진 질문을 던지신다. 상처받은 욥을 무엇보다 우선 치료해 주고 당신의 사랑을 덧입혀 회복시켜 주셔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욥에게 수십 가지 질문으로 하나님 자신의 능력을 무섭게 각인시켜 주신다. 욥에게 던진 하나님의 물음을 통해 우리는 리워야단과 같은 전 지구적 괴물, 테러리즘의 발광을 보며 그에 대한 두려움에 앞서 거듭해서 우리에게도 던지는 하나님의 질문에 대해 어떤 답을 내려야 하는지 깊은 고민에 휩싸인다.
1 네가 낚시로 리워야단을 낚을 수 있겠느냐? 네가 끈으로 그의 혀를 맬 수 있겠느냐? 2 네가 갈대 줄기로 그의 코를 꿸 수 있겠느냐? 네가 갈고리로 그의 턱을 뚫을 수 있겠느냐? …5 네가 새를 조롱하듯 그것을 조롱하거나, 네 소녀들을 위하여 그것을 묶어 둘 수 있겠느냐? 7 네가 창으로 그것의 가죽을, 작살로 그것의 머리를 찌를 수 있겠느냐? 9 보아라, 그것을 잡으려는 희망은 헛되니 그것을 보기만 하여도 기가 꺾이지 않겠느냐? 10 아무도 그것을 자극할 만큼 용감하지 못하니, 감히 내게 맞설 자가 누구냐?
(바른성경/ 욥 41: 1~10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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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박홍기 박사 (주필 철학박사 미국 오이코스대학교 교수) 이메일 : jayouda@hanmail.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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