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
단순한 앎에서 열매 있는 얻음으로 나아가야
知止而后 有定, (어디서) 그쳐야 하는지를 알게 된 후에 안정됨이 있고
지지이후 유정
定而后 能靜, 안정된 후에야 (마음과 몸이) 고요해질 수 있고
정이후 능정
靜而后 能安 고요해진 후에야 평안함이 있고
정이후 능안
安而后 能慮 평안함이 있은 후에야 깊은 생각함이 있게 되고
안이후 능려
慮而后 能得. 깊은 생각함이 있은 후에야 얻음이 있게 된다.
려이후 능득
(대학 경문)
대학에서는 큰 배움의 길이 무엇인지를 밝힌 후에 곧바로 큰 배움을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이 길에 착수해야 하는지를 밝혀주고 있다.
그 첫걸음은 그침을 아는 것이다. 명명덕의 경우를 예로 들어보자. 사람이 태어날 때 하늘로부터 받은 밝은 덕 곧 인의예지의 사단을 어느 정도까지 알아야 그것을 밝혔다고 할 수 있을까. 사람이 늘 인의예지를 유지하며 살아가는 그 지점이 어디일까. 만일에 이 부분이 해결되지 않으면 어디까지 사단을 밝게 해야 하는지를 알 길이 없게 된다. 영국인으로 중국에서 선교했던 중국학의 대가 제임스 레게(James Legge, 1815-1897)는 ‘지(止)’를 ‘the point where to rest’(편히 거처해야 하는 지점)으로 번역하였다.
편히 거처하는 지점을 알고 난 후에야 정이 있게 된다. 큰 배움의 길에 나서는 사람이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지 그 대상을 정할(determination) 수 있다는 말이다. 무엇을 공부해야 할지를 확실하게 결정한 사람에게는 흔들림이 없는 고요함(a calmness)이 찾아온다. 이 고요함이 있는 사람이 평온한 안락에 드는 것(安, a tranquil repose)은 당연하다. 평온한 안락 속에서 주의 깊은 생각함(a careful deliberation)이 깃들게 된다. 큰 배움을 하는 사람이 이렇게 깊고도 주의력을 발휘해서 사고해 간다면 그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무언가 바람직한 얻음(득, the attainment of the desired end)이 있게 될 것이다.
대학의 저자가 누구인지는 모르나 스스로 어느 경지에까지 공부를 이룬 사람임에는 틀림이 없다. 저자 자신이 이러한 배움의 경지에 오르지 않았다면 이렇게 범인이라도 공감할 수 있게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대학의 저자는 어디에서 그쳐야 하는지를 알았고, 배움의 대상과 목표를 분명히 정했으며 그 후에 고요한 마음의 평정을 이루었다. 그는 이 평정의 마음을 토대로 깊은 사고를 할 수 있었다. 그에게는 ‘지’에서부터 ‘려’에 이르는 배움의 전 과정의 열매로써 얻음이 쌓여갔다.
역대의 유학자 중에서 이런 정도의 경지에 이른 사람은 공자가 아닐까 싶다. 그 자신의 고백에 따르면 공자의 배움은 “70세가 되어서는 마음에 내키는 대로 따라 살아도 법도에서 어긋남이 없는”(논어, 학이, “七十, 從心所欲而不踰矩”)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이 정도의 경지라면 대학에서 말하는 얻음(得)의 인간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의미에서라면 배움은 인간의 삶의 규례로부터의 초월로 이해되는 것이다.
기독인의 배움의 착수는 어디에서 이루어져야 하는가. 그것은 성경을 아는 데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 그 다음에 확신한 일에 거해야 한다. 성경이 어떤 책인지 누구에 의해서 쓰였고, 쓰인 목적이 무엇이며, 현재의 나의 삶과 무슨 관계가 있는지 등을 알아야 한다.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과 단순히 다른 사람이 전하는 말이나 설교 등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질적으로 다르다. 언제까지 목사의 설교나 남의 말 또는 전통 등에 의지해서 하나님을 알아가겠다는 것인가.
성경을 배울 때 기독인은 확신한 일에 거할 수 있다(딤후3:14).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나라의 일에 확신이 서지 않아서 늘 흔들리는 것은 믿는 자의 도리가 아니다. 공자는 나이 사십에 세상의 여러 사설들에 미혹되지 않았다고 했다(논어, 학이, “四十而不惑”). 맹자도 자신은 사십이 되어서는 마음이 세속의 사설에 이리저리 흔들리지 않았다고 천명했다(맹자, 공손추 상. “我四十而不動心”). 그런데 믿는 자들이 하나님과 하늘나라의 확실한 일에 서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성경을 배우는 과정에서는 한가한 평안함이란 없다. 성경은 우리를 바쁘게 한다. 하나님을 향한 뜨거운 마음으로 늘 불붙게 한다. 천국이 가까워서 심판의 도끼가 이미 나무뿌리 위에 놓여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를 닮아가려는 마음이 뜨거워서 한가로이 생각만 하고 있을 수가 없고 게다가 성경은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준다. 또한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이기에 나 자신을 교훈(훈육)시키는데 딱 알맞다. 나를 책망하기에도, 나의 마음과 행동의 잘못됨을 바르게 하는데도 딱 알맞다. 성경이 제시하는 의(예수)가 있기에 이 의안에서 나를 의롭게 하기에 딱 알맞다.
기독인의 배움의 최고의 경지는 언제든 선한 일을 하여 온전하게 되어서 어느 것에나 완전한(아르티오스) 사람이 되는 데 있다(딤후 3:17). 동시에 믿음이 그리스도의 분량에까지 자라게 하는 데 있다(엡 4:13).
대한의 기독인이여! 참 기독인이라면 이제 시시한 배움일랑 집어치우자. 남의 설교나 듣고 말씀을 아는 척하는 거지 근성의 태도일랑 내던져버리자. 이제는 완전한 자가 되기 위해 선한 일을 도모하고 의 안에서 나를 바르게 하자. 한가한 여유로움은 기독인에게 허락되지 않는다. 바쁜 중에 여유가, 고통 중에 기쁨이, 깊은 한숨의 인생 속에 샘솟는 희망이, 죽음 속에서 생명의 솟아남을 찾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우리 함께 용납하며 온전함으로 나아가자. 온전함은 믿는 자들이 성경의 배움을 통해서 얻게 되는 열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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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프로필 글쓴이 : 문태순 박사(교육학박사), 백석대 외래교수 |
먼저 하나 나중에 하나 마찬가지 |
배움의 길을 어떻게 가야할까 |